관리 메뉴

문혜정 green time

새와 실존 / 최민자 본문

좋은 수필

새와 실존 / 최민자

선한이웃moonsaem 2020. 12. 22. 00:50

산비둘기 한 마리가 베란다 난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주면서 땅콩 몇 알을 접시에 놓아두었던 것인데 다른 놈들은 오지 않고 이 녀석만 온다. '새대가리'가 사람머리보다 기억력이 나은 건지 내가 깜박 준비를 못했을 때에도 잊지 않고 찾아와 난간을 서성댄다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새가 브런치를 즐기는 동안 나도 천천히 차 한 잔을 들이켠다.

새들에게는 역사가 없다물고기도 그렇다새나 물고기가 종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은 부리나 주둥이로 길을 내며 다니기 때문이다목구멍을 전방에 배치하고 온몸으로 밀고 다니는 것들은 대체로 족적을 남기지 못한다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앞장서 달리는 입의 궤적을 지느러미나 깃털이 흩뜨려 버리기 때문이다.

누가 새들을 자유롭다 하는가하늘에는 새들이 걸터앉을 데가 없다목을 축일 샘 하나지친 죽지 부려 둘 걸쇠 하나 없다새들에게 하늘은 놀이터가 아니다일터다망망한 일터를 헤매어 제 목숨뿐 아니라 주둥이 노란 새끼들의 목숨까지 건사해야 하는 새들은 녹두알만 한 눈알을 전조등 삼아 잿빛 건물 사이를 위태롭게 날며 기적처럼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마른 씨앗 한 알버러지 한 마리 놓치지 않고 적시에 부리를 내리꽂아야 한다.

누가 새들을 가볍다 하는가날기 위해 뼛속까지 비운 게 아니라 뼛속까지 비웠기에 겨우 나는 것이다새들은 하늘에서 멈추어 쉴 수가 없다멈추어 쉬지 못하면 깊이는 생겨나지 않는다벌어먹기 위해서 살아온 사람의 행보가 별스런 자취 없이 흩어져 버리듯, '먹고사니즘'에 바쳐지는 시간들은 종적 없이 휘발되어 버린다하지만 깊이가 무슨 소용인가한 끼 벌어 한 끼 먹는 목숨붙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존 뿐제 몸뚱이 하나로 길을 뚫으며 실존과 분연히 마주하는 새들 앞에서 새대가리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여자들은 다 새대가리야"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던 입사 동기 한 사람이 있었다상업학교를 졸업한 어린 처녀들이 많은 금융회사였으나 대학 나온 그보다 야무지고 똑똑했다남자 직원끼리 하는 말을 우연찮게 엿들은 꼴이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승진시험조차 볼 수 없었던 나는 이래저래 분이 나서 퇴사할 때까지 그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삼심 년쯤 후 어느 예식장에서 마주친 그는 점잖은 목사님이 되어 있었지만 새대가리인지 새가슴인지 그때에도 나는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산비둘기가 회보랏빛 날개를 퍼덕거리며 토분 사이로 내려앉는다뭐 좀 더 주워 먹을 것이 없나 살피려는 듯 고개를 앞뒤로 주억거리더니 이내 훌쩍 날아오른다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누군가가 진설해 놓은 지상의 밥 한 끼로 하루어치의 생존이 해결되었다 하여도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명체들에게 과거의 밥은 무효일밖에 없다새를 날게 하는 동력도 지난 시간의 중력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새대가리'의 가벼움 덕분 아닐까.

새가 난다화살촉 같은 부리를 앞세우고 흐리고 막막한 도시 하늘로 두려움 없이 솟구쳐 오른다.

 

 

 

 

깊은 통찰과 번득이는 예지, 섬세하면서도 정갈한 말맛으로 한국 산문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최민자의 신작 수필집이 나왔다. 『손바닥 수필』. 범상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범상치 않은 쉼표들, 서성이는 시간의 포스트 잇 같은 짧은 글들을 주로 엮었다. 2007년 타계한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생전에 최민자의 수필을 일컬어 “최민자의 글에는 인생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들어 있고,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유연성이 있다. 세상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예지도 들어 있다. 그리고 그 날카로움은 남을 찌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생, 사물의 이치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오는 것이다. 그의 글은 정적이면서도 또한 지적이며 반짝이는 예지, 조금만 드러낼 줄 아는 자제력, 정제된 언어 그런 것들로 해서 그의 글은 아름답다. 

출처:  [산문 산책]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아 / 윤오영  (0) 2020.12.22
방망이 깍떤 노인 / 윤오영  (0) 2020.12.22
구두와 나 / 최민자  (0) 2020.12.21
최민자 / 길  (0) 2020.12.21
억새 / 최민자  (0) 2020.12.2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