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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보라 / 최민자 본문

좋은 수필

꿈꾸는 보라 / 최민자

선한이웃moonsaem 2020. 12. 7. 01:35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색. 젊지도 않고 늙지도 않은 색. 화려한 듯 침울하고 침착한 듯 불안정한, 보라색은 마법의 색이다. 꿈과 현실, 기억과 몽상, 사랑과 이별 같은 생의 레시피를 두루 섞어 치대어 두면 그렇듯 오묘한 빛깔이 될까. 보라색은 아리송한 색이다. 과꽃의 천진함과 구절초의 애련함, 아이리스의 화사함과 도라지꽃의 외로움이 절묘하게 뒤섞인, 불분명한 정체성이 정체성인 색이다. 지적인가 하면 충동적이고, 그윽한가 싶으면 관능적이어서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모순을 껴안고 냉정과 열정 사이를 서성거리는 여자. 누구와도 화친하나 누구와도 진정 동화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복합성향의 여자. 그 여자의 난해한 눈빛 같은 색이다.

 

 

 

 

보라의 층위는 천차만별이다. 적과 청이 어느 만큼의 비율로 섞여 들었는가에 따라 무한 변용이 가능하다. 천변만화의 진폭으로 흑백의 폭압을 다소곳이 견뎌 내는 수묵의 층위처럼 연보라·진보라·남보라·회보라·자주보라·청보라 갈피갈피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보라색이 숨어 산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까다롭고 비사교적이어서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고 감상적인 구석이 많다고 한다. 우울하지만 직관력이 뛰어나 예술적 성향이 짙다고도 한다. 보라색을 좋아한다 하여도 제각기 좋아하는 자기만의 보랏빛이 따로 있을 만치 민감한 차이를 예민하게 감각하는 사람들이다.

 

 

연보랏빛 라일락과 남보랏빛 도라지꽃에 자주 마음을 빼앗기고 회보랏빛 어스름에 기분이 산란해지기도 하는 나는 보랏빛 이미지를 세련되게 매치할 줄 아는 사람에겐 기본 점수 50점쯤 일단 주고 들어간다. 대학시절엔 라벤더 빛깔의 셔츠를 입고 나왔다는 이유로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남학생을 몇 번 더 만나 준 적도 있다. 그 시절 나는 보세가게에서 산, 보랏빛 시폰원피스를 나풀거리고 다녔는데 작고 하얀 꽃무늬가 보일 듯 말듯 날염된 앞자락이 바람이 불적마다 부드럽게 파닥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홀로 있어 아름다운 색, 어울리기는 힘들어도 잘만 소화하면 최고가 되는 색, 입는 사람의 분위기에 따라 기품 있어 보이기도, 천박해 보이기도 하는, 보라의 신묘한 이중성이 좋았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것이면서 저것인 자아정체성으로 이중, 아니 다중 인격의 삶을 모호하게 살아 내고 있어서인지 나는 지금도 보라색을 좋아한다. 분열을 획책하는 이분법 세상에서 차고 뜨겁고 붉고 푸른 색깔의 편향을 지그시 제압하고 중도의 미덕을 완충해 내는 보라. 보라야말로 성과 속, 선과 악,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동시에 품어 안는 빛깔들의 총화라는 생각이 든다. 편파를 지양止揚하는 빛깔에 대한 편파적 인간의 편파적 취향인가.

 

내일모레 나는 서해의 작은 섬 자월도紫月島에 간다. 오염된 바닷가를 청소하는 환경단체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지만 나를 섬으로 유인하는 것은 바람도, 물살도, 자연보호라는 명분도 아니다. 그곳에 정말 보라색 달이 뜰까. 화성에서 온 여자의 살빛 같은 신비로운 달이 어둔 바다 저편에 환한 팬지곷처럼 떠올라 줄까. 그늘 냄새와 풀벌레 소리가 희미하게 배어든 멀리 가는 향기 같은 연보라 달빛이 섬의 치마폭을 흥건히 적실까. 시들지 않는 중년의 빛깔, 보라가 나를 꿈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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