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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정 green time

자전거 여행 / 김훈 본문

좋은 수필

자전거 여행 / 김훈

선한이웃moonsaem 2020. 12. 22. 01:06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 바퀴를 굴려서 가는 사람은 몸이 곧 길임을 안다. 길을 저무는 산맥의 어둠 속으로 풀려서 사라지고, 기진한 몸을 길 위에 누일 때, 몸은 억압 없고 적의 없는 순결한 몸이다. 그 몸이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길 앞에서 곤히 잠든다. p.17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저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곷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p.20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p.21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이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 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p.23

 

모결ㄴ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곷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p.23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p.24

 

매화 꽃잎 떨어지는 봄 바다에는, 나고 또 죽는 시간의 가루들이 수억만 개의 물비늘로 반짝이며 명멸을 거듭했다. 사람의 생명 속을 흐르는 시간의 풍경도 저러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봄 바다 위의 그 순결한 시간의 빛들은 사람의 손가락 사이를 다 빠져나가서 사람이 그것을 움켜쥘 수 없을 듯싶었고, 그 손댈 수 없는 시간의 바다 위에 꽃잎은 막무가내로 쏟아져내렸다. p.24

 

설요는 한국 한문학사의 첫장에 나온다. 7세기 신라의 젊은 여승이다. 그 여자의 몸의 아름다움과 시 한 줄만이 후세에 전해진다. 그 시 한 줄은 봄마다 새롭다. 이 젊은 여승의 몸은 꽃피는 봄 산의 관능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시 한 줄을 써놓고 절을 떠나 내려왔다.

꽃피어 봄 마음 이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이것은 대책이 없는 생의 충동이다. p.25

 

해가 뜨기 전, 봄날의 새벽에 밭에 나가보면, 땅속에서 언 물기가 반짝이는 서리가 되어 새싹처럼 땅 위로 돋아나 있다. 이것이 봄 서리이다. … 풀의 싹들이 흙덩이의 무게를 치받고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흙덩이의 무게가 솟아오르는 풀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풀싹이 무슨 힘으로 흙덩이를 밀쳐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물리현상이 아니라 생명 현상이고, 역학이 아니라 리듬이다. …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p.29

 

흙과 밭은 사랑과 고난의 사리로서 인간에게 주어졌다. 이 흙은 하느님의 몫이 아니라 버림받은 인간의 몫이다. 손바닥으로 주물러야만 한줌의 진흙은 한줌의 경작지로 바뀐다. 하느님의 가락지는 진흙 속에 숨어 있고 사람들이 그 가락지를 찾지 못해도, 이 사랑과 고난이 사람들을 그 땅에 붙잡아서 정주하게 한다. … 부부가 함께 일할 때, 늙은 부부는 이쪽저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일한다. 늙은 부부는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지만, 한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는다. … 그들은 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단계를 넘어섰거나, 아니면 소통되어야 할 의사가 이미 다 소통되어 버린 것 같았다. p.32

 

된장의 친화력은 크고도 깊다. 되낮ㅇ의 친화력은 이중적이다. 된장은 국 속의 다른 재료들과 잘 사귀고, 그 사귐의 결과 인간의 안쪽으로 스민다. 이 친화의 기능은 비논리적이고 원형질적이어서, 분석되지 않는다. 된장과 인산은 치정관계에 있다. 냉이 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 관계이다. 이 삼각은 어느 한쪽이 다른 두 쪽을 끌어안는 구도의 치정이다. 그러므로 이 치정은 평화롭다. … 이 평화 속에는 산 것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힘이 들어있다. 하나의 완연한 세계를 갖는 국물이란 흔치 않다. 된장은 냉이의 비밀을 국물 속으로 끌어내면서 냉이를 냉이로서 온전하게 남겨둔다. 냉이 건더기를 건져서 씹어보면, 그 뿌리에는 봄 땅의 부풀어오르는 힘과 흙냄새를 빨아들이던 가는 실뿌리의 강인함이 여전히 살아 있고 그 이파리에는 봄의 햇살과 더불어 놀던 어린 엽록소의 기뿜이 살아 있다. p.35

 

똑같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태어났으나 냉이는 그 고난으로부터 평화의 덕성을 빨아들이고, 달래는 시련의 액기스만을 모아서 독하고 뾰족한 창끝을 만들어낸다. p.36

 

달래는 그 작고 흰 구슬 안에 한 생애의 고난과 또 거기에 맞서던 힘을 영롱한 사리처럼 간직하는데,ㅏ 그 맛은 너무 독해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달래는 인간에게 정신차리라고 말하는 것 같다. p.37

 

쑥이 국물에게 바친 내용물은 거의 전부가 냄새이다. 그 국물은 쓰고 또 아리다.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아린 냄새가 된장의 비논리성 속에 퍼져 있다. 그 냄새는 향기가 아니라, 고통이나 비애에 가깝다. p.37

 

쑥된장국의 냄새는 그것을 먹는 인간에게 괜찮아, 다 괜찮다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의 정갈함을 일꺠우기도 한다. 그 풀은 풀의 비애로써 인간의 비애를 헐겁게 한다. p.38

 

미나리에는 그늘이 없다. 미나리는 발랄하고 선명하다. 미나리의 맛은,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시간의 맛이다. … 그러므로 미나리는 된장의 비논리성과 친화하기 어렵고 오히려 고추장의 선명성과 잘 어울린다. 봄 미나리를 고추장에 찍어서 날로 먹으면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과 전혀 다른,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새로운 날들이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 p.38

 

무등산은 서울의 북한산처럼 하늘을 치받는 삼엄한 골세의 돌올한 기상을 보이지 않는다. 이 산은 사람을 찌르거나 겁주지 않고, 사람을 부른다. 이 산은 기어이 올라가야 할 산이 아니라 기대거나 안겨야 할 산인 듯싶다. p.40

 

정자와 세상과의 관계의 본질은 서늘함이다. 정자는 그 안에서 세상을 내다보는 자의 것인 동시에, 그 밖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자의 것이다. 정자는 '본다'는 행위가 갖는 시선의 일방성을 넘어선다. p.43

 

세상을 깨부수고 바꾸려는 사람들은 대나무숲으로 와서 무기를 구했고, 셍상을 버리고 숨으려는 사람들은 대나무숲으로 돌아와 누웠다. 그래서 대나무숲은 세상으로 나가는 전진기지이며 세상을 버리고 돌아오는 후방의 쓸쓸한 낙원이다. …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대나무는 죽순이 나와서 50일 안에 다 자라버린다. 더 이상은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왕대는 80년에 한 번씩 꽃을 피운다. 눈이 내리듯이 흰 꽃이 핀다.  꽃이 피고 나면 대나무는 모조리 죽는다. 꽃 속으로 모든 힘이 다 들어가서 대나무는 더 살 수가 없다. p.46

 

삶은 소설이나 연극과는 많이 다르다.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 p.53

 

달이 하루에 두 번씩 물을 끌어당겨서 바다를 부풀게 하는 자연 현상과 달이 한 달에 한 번씩 여자의 목숨을 빨아당겨서 부풀게 하는 생명 현상이 모두 다 조(潮)이다. 밀물의 서해는 우주의 관느으로 가득 찬다.p .55

 

갯벌의 지평선 너머에서 바다는 풍문처럼 반짝이면서 밤의 내습을 예비하고 있었고, 강의 대안 쪽에서 산맥은 기세를 낮게 죽여가며 노을 속으로 잠겨갔다. 간조와 만조사이의 젖은 갯벌 위에서 저녁의 빛들은 바늘로 퍼덕거렸다. p.57

 

뻘에는 수억만 개의 구멍이 있다. 갯지렁이는 구멍 위로 머리를 내놓고 산다. 이 구멍들이 뻘에 공기를 불어넣어 갯벌은 숨쉰다. 그것들이 살아가는 끝에는 이 세상 먹이사슬 맨 밑바닥의 비애와 평화가 있다. 그리고 구태여 고달픈 진화의 대열에 끼어들지 않은 시원의 숨결이 있다. / 공깃돌만 한 콩털게와 바늘 끝만 한 작은 새우들도 가슴에 갑옷을 입고 있다. 그 애처로운 갑옷은 아무런 적의나 방어 의지도 없이, 다만 본능의 머나먼 흔적처럼 보인다. p.61

 

소금의 속성은 고요해야 한다. 짜고 향기로운 맛이 소금의 핵심부에 고요히 안정되어 있어야 하고 어떠한 잡것도 거기에 섞여서는 안 된다. 짠맛은 바다의 것이고, 향기는 햇볕의 것이다. p.64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날, 뜨거운 폭양 아래서 짜고 향기롭게 굵은 소금은 익는다. 이런 소금의 삼투력은 깊고 그윽하다. 이런 소금이 젓갈을 삭히고 잴들의 향기를 드러나게 한다. 바람 부는 날의 들뜬 소금은 쓰다. 가장 고통스런 날에 가장 영롱한 결정체들이 염전 바닥에 깔린다. p.64

 

낭가파르바트 북벽에 부딪히는 새들은 화살처럼, 총알처럼, 바람처럼 죽는다. 새들은 고속 돌진의 자세로 죽는다. 그것들의 시체 위에서 날개 달린 몸으로 태어난 그것들의 꿈은 유선형으로 얼어붙어 있고, 그 유선형의 주검은 죽어서도 기어코 날아가려는 목숨의 끝을 단념하지 않은 채, 더 날 수 없는 날개를 흰 눈에 묻는다. 潮 그러하되 만년설에 묻힌 날개의 꿈은 그 떠도는 종족의 운명 속에서 부활하는 것이어서 모든 새들은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다. p.67

 

바람 속으로 씨앗을 퍼뜨리는 풀들은 빛나는 꽃을 피우지 않고, 영롱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 갈대나 억새가 그러하다. 갈대는 곤충을 부르지 않고, 봄의 꽃들처럼 사람을 유혹하지도 않는다. … 갈대는 싹으로 솟아오를때부터 바람에 포개지는 모습을 갖는다. 뿌리를 받은 땅과 바람에 떠도는 씨앗의 하늘 사이에서 갈대는 쓰러지고 일어선다. 갈대는 초겨울에 흰 솜 같은 꽃을 피우고, 바람이 마지막 씨앗을 흝어낼때까지 갈대의 뿌리는 바람에 끄달리면서 바람에 불려가지 않는다. 갈대의 엽록소는 다른 풀들의 엽록소처럼 햇빛에 빛나지 않는다. 갈대에게는 푸르른 기쁨의 시절이 없다. 갈대는 새싹으로 솟아오르는 시절부터 바람에 포개진다. / 그것들은 어렸을 때부터 땅에 얽매인 채로 바람에 풍화되어 간다. 4월의 빛나는 산하에서는 겨울을 난 갈대숲이 가장 적막하다. 모든 씨앗들이 허공으로 흩어진 뒤, 묵은 갈대숲은 빈 껍데기로 남아서 그 껍데기까지도 바람에 불려간다. p.72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 p.74

 

가장 늙은 숲이 가장 새로운 숲이다. 숲의 힘은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살려내는 것이어서, 숲 속에서 시간은 낡지 않고 시간은 병들지 않는다. p.75

 

여름의 숲은 어둑신하고 서늘하다. 숲 속에서, 빛은 사람을 찌를 듯이 달려들지 않는다. 나뭇잎 사이로 걸려지는 빛은 세상을 온통 드러내는 폭로의 힘을 버리고 유순하게도 대기 속으로 스민다. 숲 속에서, 빛은 밝음과 어둠의 구획을 쓰다듬어서 녹여버린다. p.81

 

식물사회학 책을 보니까, 나무들도 살기 다툼의 결과로써 개체 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는데, 키 큰 나무들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다툼이 아니라 평화의 모습으로 서늘하다. 키 큰 나무들은 저마다 개별적 존재의 존엄으로 우뚝하고 듬성듬성하다. p.82

 

숲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흐르고 쌓여서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소멸과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이다 p.83

 

김춘추와 계백은 그들의 승패와 관련 없이 얼마나 상처받고 고단한 사내들이었으랴. 이 피에 젖은 사내들의 삶은 역사를 이루었고, 그들 무덤가의 숲은 역사를 이루지 않았지만, 지금 저 남쪽의 숲 속에서는 역사가 아닌 것이 역사인 것을 위로하고 있다. p.84

 

길은 어디에도 없다. 앞쪽으로는 지노가 없고 뒤쪽으로는 퇴로가 없다. 길은 다만 밀고 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다. 그는 산으로 가는 단독자의 내면을 완성한다. 그는 외로움에서 슬픔을 제거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외로움의 크고 어두운 산맥을 키워나가는 힘으로 히말라야를 혼자서 넘어가고 낭가파르바트 북벽의 일몰을 혼자서 바라본다. p.89

 

상록수의 숲은 짙고 깊게 푸르러서, 그 푸르름은 봄빛에 들뜨지 않는다. 상록수 숲의 푸르름은 겨울을 어려워하지 않는 엄정함으로 봄빛에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p.93

 

자작나무숲은 멀리서 보면 빛들이 모여사는 숲처럼 보인다. 잎을 다 떨군 겨울에 자작나무숲은 흰 기둥만으로 빛난다. 그래서 자작나무숲의 기쁨과 평화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들일 만하다. 실제로 북방 민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자작나무숲에 깃들이는 것으로 믿고 있다. p.95

 

가장 낮은 곳에 사는 가장 작은 조개 속에 가장 깊은 맛이 들어 있다. 조개 몇 마리와 물과 소금이 그 국물의 형식의 전부다. 재첩 국물은 삭신의 구석숙석으로 스며 들뜬 것들을 가라앉힌다. 재첩 국물 속에도 작은 숲이 들어앉아 있다. p.98

 

시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 5월의 찻잔 속에서는 이 접합부의 이음새가 드러나지 않는다. 꿰맨 자리가 없거나 꿰맨 자리가 말끔한 곳이 낙원이다. p.103

 

차는 책과 다르다. 책은 술과 벗을 부르지만 차는 벗을 부르지 않는다. 혼자서 마시는 차가 가장 고귀하고 여럿이 마시는 차는 귀하지 않다. 함께 차를 마셔도 차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p.103

 

차를 따서 불에 말리는 과정이 '덖음'이다. 차 맛은 이 '떡음'과정에서 크게 달라진다. 潮 덖음은 차의 독성을 제거하고, 잎 속의 차 맛을 물에 용해될 수 있는 상태로 끌어내고, 차를 보관 가능하게 건조하는 과정이다. 그날 딴 차는 하루를 넘기면 안되고, 그날 안으로 덖음질을 마쳐야 한다. p.107

 

숲은 죽음, 단절, 혹은 패배 같은 종말론적 형태를 알지 못한다. 땅에 쓰러진 자가 일어서려면 반드시 쓰러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것처럼, 숲은 재난의 자리를 딛고 기어이 일어선다. 숲은 재난의 자리를 삶의 자리로 바꾸고, 오히려 재난 속에서 삶의 방편을 찾아낸다. p.110

 

아, 다시는 저것들을 상종 안 해도 되는 이 자리의 적막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나는 그렇게 적막하게 잘란다. 병풍 뒤 칠성판 위에 누워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죽은 자의 위엄과 죽은 자의  우월감으로 처연했고 내 적막한 자리 위에서 아늑했으며, 병풍너머의 술판에 끼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었다. 나는 미소지으며 누워 있었다. 그러니 그때 나는 덜 죽은 것이었다. p.117

 

살아서 갈아먹던 밭 속으로 들어가 눕는 죽음은 편안해 보였다. 어떠한 삶도 하찮은 삶은 아닐 것이었다. 살아 있는 동안의 기쁨과 눈물이, 살아서 갈아먹던 밭 속으로 따스한 젖가슴 같은 봉분을 이루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p.120

 

그 무덤들은 삶의 지속성 속에서 평화로워 보였다. 그래서 모든 무덤들은 강물이 흐르고 달이 뜨는 것처럼 편안하다. 비가 개면 바람이 불듯이, 그 편안함이 순리로 다가올 때까지. 이승에 남아서 밥벌이나 하자. 벗들아, 그대들은 경명했던 내 꿈속의 적막을 용서해다오. 봄볕 쪼이는 흙 속의 유혹은 아마도 이 순리의 유혹이었을 것이다. p.121

 

날똥이여,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월이여 청춘이여 조국이여, 모든 것은 결국 날똥이 되어 가락국수처럼 비실비실 새어나가는 것인가. 

 

남자 칸과 여자 칸은 서양 수세식 변소처럼 철벽으로 가로막힌 것이 아니라, 같은 건물안에서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다. 화장실의 남녀 칸을 철벽으로 막아놓은 것이 문명이 아니다. 화장실 남녀 칸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선암사 화장실에 정답이 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p.123

 

그 서당 안에서 퇴계의 공부방은 2평을 넘지 않는다. 인간이 지상에 세우는 물리적 구조물은,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의 절박한 내적 필연성의 산물이라야 한다는 것을 도산서당의 구조는 말해주고 있다. p.132

 

도산서원의 입구 매표소에서부터 강을 끼고 걸어 올라가서 도산서당에 닿는 길은 책 읽기와 세상 읽기, 혼자 살기와 더불어 살기, 세상 속에서 살기와 세상 밖에서 살기의 관계, 그리고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인간의 물리적 공간 속에서 어떻게 설정하고 자리매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도산서당은 폐쇄된 자아의 밀실이 아니다. 그 서당의 물리적 위치는 인간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거기에 함몰하지 않는 위치이다. 그렇게 해서 책과 세상은, 서로 적당히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역동적인 메시지를 상호 교환할 수 있었다. 

 

그(퇴계)가 ㅅ상을 떠나던 날 저녁에 눈이 내렸다. 제자들을 시켜 당신이 아끼던 매화나무에 물을 주게 하고 임종의 자리를 정돈시킨 다음 몸을 일으켜달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여 한 평생을 지켜온 정좌의 자세로 앉아서 세상을 떠낫다. p.134

 

그의 뜻은 자연에 있었으나 그는 자연의 맹목적인 아름다움에 함몰하지는 않았다. 그가 생각했던 아름다움은 인격의 내면성에 바탕을 둔 것이고, 자연은 탐닉이나 열광, 음풍농월의 대상이기보다는 인간을 고양시키고 정화시키는 인격적 기능으로써 아름다운 것이고 인간의 편이었다. 

 

담장은 차단이고, 길은 연결이다. 길은 낮은 흙담을 따라 굽이친다. 차단과 연결이 함께 길을 따라 흐른다. 길은 대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이 집 저 집의 모퉁이를 돌아서 대문에 당도한다. 인간의 삶은 감추어져야 하고 또 드러나야 한다. p.139

 

아파트에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아무리 고층이라 하더라도 아파트는 기복을 포함한 입체가 아니다. 아파트는 평면의 누적일 뿐이다. 천장이고 방바닥이고 부엌 바닥이고 현관이고 간에 그저 동일한 평면을 연장한 민짜일 뿐이다. 얇고 납작하다. 그 민짜 평면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꼐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궁이는 땅속과 하늘을 연결하는 바람의 통로이다. 그 통로의 입구이다. 불길은 고래를 따라서 흐르다가 연기가 되어 굴뚝으로 빠져나가 하늘로 오른다.  사람이 눕는 방바닥 밑으로 하늘과 땅이 소통하고, 그 통로를 따라 불길이 흐른다. 우물 속의 물과 아궁이 속의 불은 언제나 새롭게 빚어지는 원소들이다. 이 새로움은 우물과 아궁이라는 늙음의 형식 속에서 빚어진다. 새로움의 내용은 늙음의 형식안에 편안하게 담긴다. 

 

마루가 이룩한 진화의 내용은 그 서늘함에 깃들이는 공적 개방성이다. 그리고 마루가 이룩한 진화의 정도는 마루와 땅 사이의 거리, 그 빈 공간의 높이다. 사람이 신발을 벗지 않고도 편하게 걸터앉을 수 있는 높이에서 마루의 진화는 완성된다. 그러므로 개들은 마루 밑에 들어가서 땅에 배룰 깔고 자는 것이 마땅하다. 

 

미닫이문은 벽을 헐어내고 만든 통로가 아니다. 미닫이문은 애초부터 통로로 태어난 문이다. 이 문이 소통과 구획을 동시에 수행한다. p.146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은 다르지 않다. 철제 무기의 경이로운 날카로움을 정련해가던 가야의 마지막 날들에, 우륵은 가야금을 완성한다. … 위태로운 조국의 마지막 순간에 우륵은 가야금을 들고 조국을 떠난다. 그는 적국인 신라의 진흥왕에게 투항했다. 그가 버린 조국의 이름은 그의 악기에 실려 후세에 전해졌고, 그의 악기는 신라의 천년의 음악 바탕을 이루었다. p.149

 

매맞는 소가 불쌍한지 때리는 인간이 더 가엾은지, 의풍에서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때리고 맞는 것이 다 한가지로 보였다. / 어느 쪽이 떄리고 어느 쪽이 맞는 것이 아니다. 양쪽 모두 자신의 운명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것이 「정감록」의 축복이었을까. 그러니 세상에 복지란 없는 모양이다. p.163

 

그들의 삶의 자취는 정반대다. 원효는 인간의 구체적 실존 속으로 나아갔고, 의상은 화엄의 사유 체계를 건설했다. 당나라로 가는 부두에서 두 청년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 한잔 나누어 마시고 헤어졌다. 자신에게 절실한 길은 따로따로인데, 청춘은 아름답다는 말은 이런 대목에서나 써야 한다. 의상이 낙산사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원효는 설악산 영혈암에서 산을 바라보고 있다. p.174

 

원효는 사랑의 깃발을 당당히 내세우면서 여자한테 가지 못하고, 여자 집 앞에서 일부러 개울에 빠져서 옷을 적시고, 옷 좀 말려달라는 구실로 여자한테 접근했다. 이것은 속세 대중이 하는 수작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옷을 말리라면 옷을 벗어야 하는데, 설총은 그날 밤에 잉태되었다. p.175

 

원효는 살아 있는 여자의 몸에 아들을 낳았고 의상은 죽은 여자의 넋 위에 절을 지었다. … 이것이 부처님 나라의 사랑법이라고 해도 넋은 여전히 가엾다. 용이 되었기로, 밥상을 차리고 싶었던 젊은 날의 꿈을 버틸 수가 있었을까.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 생각해보니,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었다. 불법의 바다는 넓고, 슬픔의 바다도 넓다. p.176

 

화엄은 인간의 존재를 일시에 열어젖혀 모든 티끌과 모든 순간 속으로 나아가게 한다. 화엄이 열어내는 자유의 사공 속에서는 티끌이 작고 세계가 큰 것이 아니며, 순간이 짧고 영원이 긴 것도 아니며, 그리고 그 반대도 아니다. 그 새로운 시공 속에서 티끌과 우주는 융합하고 순간과 영원은 삼투하는 것인데, 그렇게 합쳐지는 시간과 공간은 사람들이 부처의 나라를 일이켜 세울 수 있는 자유의 터전이다. p.177

 

부석사에서 내려다보는 소백산맥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을 달리는 산맥으로 떠오르기 십상인데, 그 풍경은 그것을 들여다 보면서 그것을 설명하려는 자에게 침묵을 명령하는 듯하다. p.178

 

빛과 바람에 몸을 절여가며 영일만 바닷가를 달릴 적에, 몸속에서 햇덩이 같은 기쁨이 솟구쳐올라, "아아아" 소리치며 달렸다. 삶을 쇄신하는 일은 결국 가능할 것이었다. 길이 아까워서 천천히 가야 하는데, 길이 너무 좋아서 빨리 가게된다. p.186

 

회를 먹을 때는 피해야 할 것이 두 가지이다. 첫째는 양식된 생선이고 둘쨰는 냉동된 고기이다. … 어부들은 비싼 값을 치르며 양식되고 냉동된 광어나 우럭을 먹지 말라고 도다리를 먹으라고 권한다. 도다리는 양식으로 키울 수 없다. p.190

 

생명을 가진 것들의 색깔은 '노랑'이나 '초록'같은 개념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색깔이다. 그래서 그 색깔은 정처없고, 불안전해 보인다. 김치 담가 먹은 무와 배추의 아름다움을 겨울 진도에서는 알 수 있다. … 눈 속에서 견디느라고 배추의 섬유질은 완강해져 있다. 씹을 때는 와삭와삭 소리가 나면서 액즙이 입 안에 가득 찬다. 겨울 배추는 잎맥 사이에 월동용 당분을 저장한다. 겨울 파는 흰 밑동 부분에 끈적거리는 진액이 많다. 이것을 날로 씹어먹는 것은 겨울과 봄을 함께 씹어먹는 일이다. p.199

 

그 옛 모습의 원형이라는 것은 오직 군더더기가 없고 단출한 것이다. 그리고 결핍 속에서 우아한 것이다. 그것이 허소리가 말했던 '법'이다. "법이 있어야 아름다울 수가 있고 아름다워야 신묘하게 될 수가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p.202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펜을 쥔 자들의 엄살이거나 자기 기만이기가 쉽상이다. 그말은 정치적이다. 칼을 쥔 자들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문(文)은 세계를 개조하는 수단으로서의 무(武)를 동경한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정직하다. … 그의 칼은 다만 조국의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위한 칼이었다. 그의 칼은 칼로서 순결하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 … 가슴에 근심 가득 뒤채이는 밤 / 새벽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 '비출 조'자 속에서, 달과 칼 사이에서,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하는 자의 살기는 극도로 억눌려 있다. 이 내면의 억눌림이 그의 외로운 전쟁을 버티어준 마음의 힘이었다. p.204

 

이순신의 적은 우선 일본 군대가 아니라 겁에 질려 도망가는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그는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는 죽음의 힘으로 이 아수라를 돌파한다. 그는 죽음 앞에서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다. p.209

 

그는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는 그를 두려워했다. 이것이 그의 비극의 극원이었다. p.213

 

사인화한 권력은 조직의 기능과 역할에 따라서 권위를 분배하지 않는다. 권위는 최고 권력자에 대한 근접도에 따라서 분배된다. 이 사인화한 권력이 '헛것'의 지배를 가능케 한다. 사무라이들의 전쟁이 강렬한 장식과 상징물로 패션화하는 배경도 권력의 사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전쟁은 이민족과 싸우는 조국 수호 전쟁이 아니라 언제나 무가 가문들 사이의 패권 다툼이었다. p.218

 

영웅이 아닌 우리는 이도 저도 할 수 없다. 역사는 모순이며 비애이다. 우리는 억눌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우리는 패션이 공격 무기가 되는 세상에서 살기 싫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힘이 현실을 개조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싶다. p.220

 

신경준에게 길은 삶의 도덕적 가치와 상징들 사이로 뻗어나간 공적 개방성의 통로이다. 이 공적 개방성의 통로 위에서, 길을 가는 길은 달리기가 아니라 '행함'이고, 길의 외로움은 집의 어짊에서 출발해서 집의 어짊으로 돌아온다. … 신경준의 도로 인식에는 속도의 개념이 빠져 있다. 그의 길은 가야 할 곳을 마침내 가는 그 '감'을 도덕으로 인식하는 길이다. p.223

 

엄 노인은 사람이 죽어서 산으로 가는 이 마지막 사업을 '입산'이라고 말했다. 그의 '입산'이라는 말 속에서, 삶은 삶이 다하는 자리에서 펼쳐지는 평화의 깊이로 느껴졌고, 그래서 위로받아야 할 쪽은 상여 속에 누워서 입산하는 죽은 자가 아니라 빈 상여를 메고 하산해야 하는 산 자들일 것이다. p.228

 

겉불꽃이 되었건 속불꽃이 되었건 어떻게 불이 수억 년을 잠자는 흙을 흔들어 깨워서 그 아득히 먼 아름다움을 이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서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보일 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 불길들이 애초에 장작 속에 들어 있었다는 것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도공도 거기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p.246

 

출발 전에 장비를 하나씩 점검해서 배낭에서 빼 버릴 때, 몸이 느끼는 두려움은 정직하다. 배낭이 무거워야 살 수 있지만, 배낭이 가벼워야 갈 수 있다. 그러니 이 무거움과 가벼움은 결국 같은 것인가. 같은 것이 왜 반대인가. 출발 전에 장비를 하니씩 빼 버릴때 삶은 혼자서 조용히 웃을 수밖에 없는 비애이며 모순이다. p.253

 

산맥의 가득 찬 가을빛 속에서 겨우 한줌의 빛오라기를 추슬러 간직하는 카메라는 가엾은 기계였다. 내일은 또 내일의 빛이 쏟아져내릴 터인데, 그 감당 못할 영원성 속에서 그가 작동하는 셔터의 60분의 1초는 가엾은 시간이었다. p.258

 

그들이 도대체 무슨 책임져야 할 일을 저질렀기에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고향은 아직은 그리던 고향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 고단한 고향에서, 돌아온 고향 사람들이 새로운 고향의 희망을 길러낼 수 있을까. 고향에서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리던 고향이 아닌 고향도 결국은 그리던 고향일 터이다. p.271

 

강은 인간의 것이 아니어서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지마느 길은 인간의 것이므로 마을에서 마을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모든 길은 그 위를 가는 자가 주인인 것이어서 이 강가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과 친인척과 이웃은 흔히 상류와 하류 사이의 물가 길을 오가며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 늙은 길은 가(街)가 아니고 로(路)도 아니며 삶의 원리로서의 도(道)이다. p.273

 

수만 년을 물의 흐름에 씻긴 바위들은 그 몸속에 흐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모든 연약한 부분들을 모조리 물에 깎인 그 바위들은 완강한 단단함으로 물속에 박혀 있었는데, 그 단단함은 유연하고 온화한 외양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바위는 박혀 있는 바위인 동시에 흐르는 바위였고, 존재 안에 생성을 간직한 바위였으며, 가장 유연한 형식으로 가장 강력한 내용을 담아내는 바위였다. p.274

 

흐르고 또 흘러서 마침내 아무런 역사를 이루지 않는 강물의 자유는 얼마나 부러운가. 그 강가에서 인간의 기나긴 고통은 역사를 이루었는데, 역사를 이루던 인간의 마을은 이제 인간의 유적지로 변해간다. 시간과 강물이 인간의 유적지를 흘러가고, 길은 빈 마을에서 비어가는 마을로 강을 따라 뻗어가는데, 바위가 물에 쓸리듯이 사람들은 시간에 쓸리고 있었다. p.276

 

삶의 질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자연스럽다. 저절로 되어지는 속에서 아이들은 배운다. 가르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배운다. 삶이 곧 교육이 되는 학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진리가 공부가 파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나르는 돼지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리는 추상화한 교훈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p.282

 

인수의 일기장은 새, 꽃, 안개, 구름, 아침, 고추, 옥수수, 나무, 나비 같은 것들로 가득하다. 인수는 자라서 시인이 되려나보다. 그런데 인수한테 물어 보니까 그게 아니었다. 인수는 자라서 형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왜 하필 형사냐?:라고 내가 묻자. "형사가 되어서 나쁜 놈들을 다 잡아가두겠다"라고 인수는 대답했다. 이 세상에는 명백한 악이 존재한다는 운명적 사실을 어린 인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인수가 세상의 악을 알아가는 마음의 과정들을 생각하면서 속으로 울었다. p.287

 

조류학자들에 따르면, 철새들은 해마다 찾아오는 특정 지역에 대한 인상이 유전자 속에 각인된다고 한다. 무서운 추억이다. 추억이 본능이며 생명력인 것이다. 그래서 서울의 한강을 찾아오는 철새의 집안은 수만 년 동안 대대로 이 강을 찾아온다. 새들도 사람처럼 본관을 가져도 괜찮을 것이다. p.300

 

"흘러가는 것은 저러하구나"라고 공자는 강가에서 말했다. 흘러가는 것은 거라하다. 젊은 날에는 늘 새벽의 상류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이제는 강물이 바다로 흘러오는 하류의 저녁 무렵이 궁금하다.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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