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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정 green time

밧줄의 아름다움 / 김훈 본문

좋은 수필

밧줄의 아름다움 / 김훈

선한이웃moonsaem 2020. 12. 22. 01:13

자전거는 땅 위의 바퀴다. 자전거는 갯벌을 지나서 물 위로 갈 수 없다. 자전거는 늘 갯벌에서 멈춘다. 그리고는 갈 수 없는 먼 바다를 다만 바라본다. 나는 어느 날 갯벌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늘 바라보기만 하던 바다로 나아갔다. 항구에서 연근해 어선을 탔다. 어선의 갑판에 널린 물건들은 지저분하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어선은 그 무질서해 보이는 모습 속에 가지런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어선의 갑판에는 필수 불가결한 물건들만이 정확한 제자리에 놓여 있는데 그 전체의 모습은 어수선해 보인다.

내가 탄 배는 병어 잡이를 주목적으로 삼는 배였지만, 그물을 걷을 때마다 새끼고래에서 꼴뚜기까지 다양한 생선들이 올라왔다. 그 배에서 45일을 지냈다. 내가 탄 배는 10 11일의 일정이었다. 흔들림에 약한 나는 바다에서 항구로 돌아가는 배로 바꾸어 탔고 먼저 상륙했다. 그 짧은 항해 기간 중에 나는 배에서 선원들이 고기잡이에 사용하는 밧줄의 쓰임새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 밧줄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이 짧은 글을 쓴다.

선원들은 밧줄을 소중히 다룬다. 밧줄이 엉기거나 꼬이지 않도록 늘 가지런히 사려놓는다. 용도에 따라서 배의 앞쪽에 싣는 밧줄이 따로 있고 뒤쪽에 싣는 밧줄이 따로 있다. 닻을 내리거나 그물을 치거나 그물을 올리는 작업이 모두 밧줄의 작용이다. 앞에 선 선원이 그물을 올리느라고 밧줄을 당기면 뒤에 선 선원은 그 밧줄을 뒤로 걷어내면서 가지런히 사린다. 선원들의 모든 작업은 밧줄에서 밧줄로 이어진다. 선원들은 하루 종일 함께 작업을 하면서도 서로 말을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선원들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상대편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알아서 동료의 작업에 나의 작업을 맞춘다. 아침에 내린 그물을 저녁에 거두는데, 밧줄을 내리고 밧줄로 거둔다. 밧줄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키고 그들의 작업을 통합해 주고 그 작업을 일련의 유대와 지속 위에서 흘러가게 한다. 노동의 밧줄을 통해서 인간의 몸에서 다른 인간의 몸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너의 노동과 나의 노동이 합쳐지는 연결 통로가 밧줄이다.

암벽등반가들의 자일은 톱과 세컨드를 연결시킨다. 세컨드는 톱의 뒤를 바짝 따라붙으면서 안전 위치를 확보한다. 세컨드는 톱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도 톱의 형편을 알고 있다. 톱은 세컨드와 연결된 자일에 기대어 비로소 길 없는 암벽 위로 길을 더듬어낼 수 있다. 자일은 톱의 뒤로 늘어져 있고, 가야 할 길은 톱의 앞으로 뻗어 있다. 뒤로 늘어진 밧줄이 톱을 앞으로 밀어준다. 만일 톱이 추락하더라도 톱은 세컨드와의 거리만큼만 추락한다. 추락하는 톱은 이제 안전 위치를 확보한 세컨드의 자일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연결됨으로써, 인간은 개별적 존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수행해낼 수 있다. 그것이 밧줄의 아름다움이다.

암벽 등반가들의 밧줄은 수직으로 뻗어나가지만, 선원들의 밧줄은 넓은 바다를 수평으로 뻗어나간다. 밧줄이 물밑으로 인간의 몸을 대신해 준다. 배에 의지한 인간은 다만 밧줄을 풀고 당김으로써 고기를 건져 올릴 수 있다.

선원들은 길게 늘어서서 밧줄을 당기거나 푼다. 맨 앞에 선 선원이 가장 경험 많은 고참이다. 신참은 맨 뒤에 서서 줄을 사리거나 풀어낸다. 몸과 몸이 연결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바다 밑을 더듬어낼 수 있다.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소방관들의 몸도 소방 호스에 따라 연결되어 있다.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서 호스를 끌고 불 속으로 들어간다. 연결이 인간에게 없던 힘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소방관은 불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나는 최초로 끈을 발명한 인류의 선배를 상상할 수 있었다. 끈과 밧줄을 발명한 인간은, 인간의 몸과 노동을 외계 속으로 그리고 다른 인간의 몸속으로 확대시키고 연관시킨, 위대한 선구자일 것이다.

배에서 빈둥거리면서 먹고 놀던 나는 선원들의 노동 앞에서 무참하고 민망했다. 내가 일을 좀 거들어주는 시늉을 하면서 밧줄을 당기려 하자 늙은 선원은 나를 걸리적거린다고 면박을 주어서 선실 안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선실 창문으로 선원들의 노동을 바라보았다.

항구로 돌아올 때 배는 바다로 나아갈 때처럼 가지런히 사려진 밧줄 뭉치를 싣고 있었다. 노동은 없었던 일처럼, 보이지 않았고 선원들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잘 사려진 밧줄이 햇볕에 말라서 반짝거렸다. 고기비늘들이 그 밧줄에 달라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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