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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정 green time

무사한 나날들 / 김훈 본문

좋은 수필

무사한 나날들 / 김훈

선한이웃moonsaem 2020. 12. 22. 01:24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임화는 시 「자고 새면」에서 “자고 새면 / 이변을 꿈꾸면서 / 나는 어느 날이나 / 무사하기를 바랐다”고 썼다.>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는지 불행이 되는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랐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랐다.

죽을 생각 하면 아직은 두렵다. 죽으면 우리들의 사랑이나 열정도 모두 소멸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 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 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사랑과 열정으로 더불어 하루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복받은 일이다.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일이 있었다. 연기가 빠져나가듯이, 생명은 가뭇없이 빠져나갔다. 생명은 본시 연기나 바람 같은 기체가 아닐까. 생명이 빠져나간 육신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고, 죽어가는 육신의 눈을 떠서 마지막 이승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이승의 마지막 풍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아직 살아 있는 나는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마지막 망막의 기능으로 아직 살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망막에 비친 살아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죽어 가는 그와 마찬가지로, 한 줌의 공기나 바람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서웠다. 그와 나는 마지막 시선을 교환하면서 작별했고, 차가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또 나의 몫이기도 할 것이었다. 다 똑같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그 무서움은 공유되는 것이 아니고 각각 저마다의 몫일 뿐이다.

나는 춥고 어두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할 일이 무섭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의 무사한 하루하루에 안도한다. 행복에 대한 내 빈약한 이야기는 그 무사한 그날그날에 대한 추억이다. 행복이라기보다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딸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딸아이는 나에게 휴대폰을 사 주었고 용돈이라며 15만원을 주었다. 첫 월급으로 사 온 휴대폰을 나에게 내밀 때, 딸아이는 노동과 임금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그 자랑스러움 속에는 풋것의 쑥스러움이 겹쳐있었다.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

그 아이는 아마 월급쟁이로서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은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딸아이는 어렸을 때 침을 많이 흘렸고, 늘 젖을 토했다. 두 돌이 다 지나도록 턱 밑에 수건을 매달았다. 안아 주면 늘 삭은 젖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젖 냄새에 늘 눈물겨웠다. 이것이, 내 혈육이고 내가 길러야 할 내 어린 자식의 냄새로구나, 내가 배반할 수 없는 인륜의 냄새로구나…….

술 취하고 피곤한 저녁에, 잠든 아이의 머리에 코를 대고 아이의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때때로 슬펐다. 내 슬픔은 결국 여자의 태(胎)에서 태어나서 다시 여자의 태속에 자식을 만드는 포유류의 슬픔이었다. 여자의 태는 반복과 순환을 거듭하며 생명을 빚어내는 슬픔의 요람이었다. 이 어린아이가 자라서 또 여자가 되었다. 결혼을 해도 좋을 만큼 자란 여자 성인(成人)이 된 것이다.

이 여자아이가 또 여자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여자아이를 낳을 것이다. 나는 이 진부하게 순환되는 삶의 일상성 속에서 기적과도 같은 경이를 느꼈다. 삶은 느리고도 길게 계속되는 것이고, 무사한 그날그날 속에서 젖을 토하던 아이가 다 큰 여자로 자라는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내미는 딸을 바라보며, ‘아, 살아 있는 것은 이렇게 좋은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 기뻐했다.

이 무사한 하루하루가 흘러 결국은 저 차가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더라도, 그 시간 속에서 핏덩이는 자라서 여자로 변한다. 그 아이는 내가 기른 아이가 아니라, 저절로 자란 아이였다. 무사한 날들의 이 한없는 시간들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아이를 여자로 길러 줄 것인가. 그리고 그 생명의 고유한 힘이 아니라면, 어린아이가 어떻게 여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핏덩이가 자라나서, 검은 머리카락이 늘어지고 젖가슴이 도드라지고 또 어깨가 둥글고 잘 웃는 여자가 된다는 것, 이 생명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지상에는 없다.

그 아이가 어려서, 분홍빛 잇몸에서 흰 싹 같은 앞니가 돋아나고 또 말을 배우느라고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종알거릴 때도 나는 이 진부한 일상 속에서 살아서 작동하는 삶의 신비를 느꼈다. 이 작은 신비들이 시간 속에서 쌓이고 또 쌓여 갓난아이가 여자로 바뀌는 모양이다.

다시 눈을 뜨고 이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들을 들여다보니, 거기서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누렇고 붉은 열매들이 열린다. 그리고 태어난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시간 속에서는 덧없는 것들만이 영원하다. 모든 강고한 것들은 무너지지만, 저녁노을이나 아침이슬은 사라지지 않는다.

갓난아이가 여자로 자라는 기적과, 영원히 덧없는 것들의 영원함만이 구덩이를 기다리는 이 무사한 그날그날의 행복이다.

나의 행복은 이처럼 작고 초라한 것이다. 딸이 늦게 귀가하는 날, 딸이 사다 준 휴대폰으로 딸에게 전화를 걸면 그 다 자란 여자가 말한다.

“아빠, 저 오늘 늦으니까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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