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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의 사회적 기능과 최민자 수필 / 정희승 본문

좋은 수필

서정의 사회적 기능과 최민자 수필 / 정희승

선한이웃moonsaem 2020. 12. 23. 23:58

흔히 서정은 사회 현실을 외면한 채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도 관심을 가져 달라는 애정 어린 권고도 자주 접한다. 서정적인 글을 쓰는 작가들은 그때마다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사설과 같은 글이라면 몰라도, 지성을 바탕으로 한 전언을 담기가 마땅치 않아서다. 사회와 정치 현실은 분석과 비판, 설득 등이 요구되는 이성의 영역에 속하는 반면, 서정은 정을 바탕으로 한 감성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성적인 글과는 지향하는 바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서정적인 글은 일차적으로 미적 감동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서정은 본질적으로 정치성과 무관한 것일까? 참여를 거론하기 전에 먼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선행되어야 할 줄로 안다.

 

 

 

1.서정의 행위도식

 

서정을 비판할 때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게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아도르노의 언명이다. 잘은 모르겠으나 아도르노는 세계와 자아가 일치된 또는 동일화된 서정의 심적 상태를 부정적으로 본 게 아닌가 싶다. 일견 사회 현실을 도외시하고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도르노의 언명에는 흔쾌히 수용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구석이 존재한다. 정을 주거나 표현하는 시를 쓰는 게 왜 야만일까? 서정시와 아우슈비츠란 사태 그리고 야만이 서로 모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세계와 자아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선행되는 행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은 가는 길을 멈추고 옆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는 길’은 생존하고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시련과 난관을 극복해나가는 삶의 서사 축을 일컫는다. 개인의 역운과 관련이 있는, 삶의 근간이 되는 축이다. 서정은 그 축의 어느 한 지점, 곧 어느 한 순간에 발생한다. 여기서 자연스레 ‘①가는 길을 멈춘다 ②주위나 옆을 바라본다 ③대상과 자아를 동일화한다’라는 3단계로 이루어진 서정의 행위도식이 도출된다. 그러니까 삶의 서사가 줄기라면 서정은 가지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는 서사가 통시성과 관련이 있고, 서정은 공시성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 정을 주고 표현하는 서정이 별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우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낙담한 사람의 등을 토닥여주고, 외롭게 피어 있는 꽃의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을 꼭 안아주기도 할 것이다.

 

서정의 행위도식을 도출한 건 정치성은 상태가 아닌 행위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린 정치성의 무게중심이 세계와 자아가 일치된 상태보다 그 선행 단계, 그러니까 가는 길을 멈추고 옆을 바라보는 행위에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서정은 앞이 아닌 옆을 지향한다. 그것은 타자의 존재를 승인하고 공감과 공존을 지향하는 원초적인 몸짓이요, 조금 느리더라도 두껍고 풍요롭게 살려는 태도이다. 이 삐딱한 시선은 삶의 구속에서 잠시 벗어나 있어 대상을 심미적으로 대하기 쉽다. 서정적인 글은 일상화된 이런 부단한 운동성 속에서 탄생한다. 그러므로 서사와 서정은 서로 대립적이지 않고 보완적이다.

 

참고로 굳이 도식이라고 한 것은 단위 행위들이 실제 삶에서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①‘가는 길을 멈추다’는 빈둥거리다, 해찰하다, 딴 짓을 하다, 쉬다, 기다리다 등으로, ②‘주위나 옆을 바라본다’는 관찰하다, 관심을 기울이다, 직관하다 등으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③‘대상과 자아를 동일화 한다’도 절대적이지 않다. 대상과 자아의 관계 양태가 다르게 표출되어 서정이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2.서정의 사회적 기능

 

서정의 사회적 기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서정의 행위 도식을 나치 치하로 옮겨볼까 한다. 그래야 아도르노의 언명이 온당한지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파시즘이란 대중이나 국민이 다양성을 표출하지 못하고 한 몸이 되어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체제를 말한다. 민주주의와 파시즘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 선동하면 민주주의는 언제든 파시즘으로 전락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후 정치경제적으로 지리멸렬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한 사회 환경 속에서, 강성했던 비스마르크 시대의 제국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면서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한다. 1934년 총통이 된 히틀러는, 민족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독재체제로 정체를 바꾼 후, 유대인을 말살하기 위한 서사를 진행시킨다. 나치는 악의 평범성 속에서 치밀한 수송계획을 세워 유대인을 아우슈비츠와 같은 강제수용소로 이송시킨다. 아무도 그 대열에서 걸음을 멈추고 옆을 보지 않는다. 옆에는 희생양이 된 유대인이 슬픈 얼굴로 자비를 바라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치는 일심동체가 되어 오직 앞만 보고 행군한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서정은, 공동체의 거대 서사에서 소외된 약자나 소수자에 눈길을 주기 마련이다. 개인의 삶에서 자신의 역운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옆의 존재, 그러니까 풍경이나 사물,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사소한 일화나 사건을 향하듯 말이다. 70·80년대 우리나라 리얼리즘 문학에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민이나 노동자, 빈민이 자주 등장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비극적인 역사가 말해주듯, 나치 치하에서는 이런 서정의 도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포로수용소에서 귀환한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타자 철학을 전개한다. 주체에게 타자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고아와 과부의 얼굴로 나타난다. 그 얼굴은 바로 나치가 외면했던 유대인의 얼굴이기도 하다. 타인의 얼굴은 모든 윤리성의 기원이며 절대성 자체다. 왜냐하면 얼굴은 신이 현현하는 성전聖殿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그 얼굴에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그 얼굴의 타자성은 주체 중심의 타자성이 아니다. 자아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 곧 만유에 있기 때문이다. 주체는 바깥 세계에 숨겨져 있는 익명성이다. 비록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지만, 레비나스 철학의 근저에는 옆, 곧 타자를 향하는 서정의 시선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전통적인 서정에서는 타자가 주체의 인력에 이끌려 동일화되는 구도이지만, 레비나스 철학에서는 거꾸로 주체가 타자의 인력에 이끌려 동일화되는 구도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동일화의 인력은 그의 철학에서 에로스로 나타난다. 이는 주체 중심이 아닌 타자 중심으로 서정이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은 서정의 관점에서 보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옆을 보는 주체가 아닌, 옆을 보지 않으면 안 되는, 타자에 무한한 책임이 있는, 전적으로 타자에 내맡겨진 주체가 되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같은 유대인임에도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한 아도르노의 비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념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옆을 보는 태도 자체가 이미 참여다. 아도르노의 언명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게 야만이 아니라, ‘자유롭게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체제야말로 야만이다’라고. 파시즘은 바로 그런 체제였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해서인지 아도르노도 자신의 말을 나중에 철회한 걸로 안다.

 

 

 

3.최민자 수필의 의의

 

그렇다면 서정과 인문학적 통찰이 한 작품에 융합되어 나타나는 최민자 수필이 갖는 의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서정의 지형이 산문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의 수필은 하나의 사건이다. 문학에서 서정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전통적으로 서정시는 주체를 중심으로 한 대상의 동일성, 곧 은유성에 바탕을 두었다. 그런데 ‘차이’를 중시하는 비동일성, 곧 환유성에 근거한 반서정시(반시)가 등장한다. 이 시대의 분열되고 해체된 사회와 개인의 내면성을 반영하고 서정을 확장한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역사성과 윤리성이 약하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제 서정이 시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최민자 수필은 서정이 시에서 산문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다. 그의 수필에는 동일화의 인력이 다소 느슨해진 서정성에, 철학적 통찰이 융합되어 나타난다. 감성적인 요소와 이성적인 인문학적 요소가 동시에 서정 도식 위에서 작동한다는 말이다. 산문이 아니고서는 작품으로 형상화하기 어려운 인문적 서정, 또는 복합 서정이다. 이는 다른 수필가와다름을 추구한 데서 나온 독특함singularity이 아니다. 그것은 그만이 가능한, 스스로 기원이 된다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독창성originality이다. 그의 수필은 이 시대에 요청되는 감성적 이성, 또는 심미적 이성이 생기하는 장소를 마련한다는 의의를 갖는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면 어떻게 될까? 우린 앞서 레비나스를 통해 주체 중심이 아니라, 타자 중심, 그러니까 대상이나 객체 중심의 서정도 가능함을 살펴보았다. 레비나스를 자주 언급하는 건 서정이 대상이나 타자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타자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비워야 한다. 흔히 외존을 말할 때 existence라는 단어를 쓴다. 여기서 ex는 바깥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existence는 황홀 혹은 신과 합일된 법열상태, 즉 엑스터시를 의미한다. 그런 세계에서는 진정한 타자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본질을 실현하는 나르시시즘의 세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대신 excendenc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굳이 번역하자면 ‘옆으로의 초월’쯤 되겠다. 나의 밖으로, 공동체 밖으로, 더 나아가 인간 밖으로 나간다는 의미다. “나 자신(soi), 이것은 나의 동일성으로부터의 이탈défection또는 와해défaite다.”(AE, p.18) 이는 생태학에서 강조되는 탈-휴머니즘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이런 서정을 감당하는 데는 당연히 시보다는 산문이 더 적합할 것이다. 감성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암울하고 묵시록적인 이 시대가 서정에 산문의 참여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타자 중심의 서정만을 국한해서 말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서정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서정은, 표층에는 보편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이성적인 언표가 배치되고, 심층에는 감성이 흐르는, 극한 지점까지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유의 깊이를 잃지 않으면서 대상을 감성적으로 껴안는 최민자 수필가의 인문적 서정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고 하겠다.

 

 

 

4.서정의 위기와 과제

 

존재의 토포로지

 

모든 존재는 방위성 속에 있다. 기술문명을 비판한 하이데거는, 균일하고 무한히 확장만 가능한 뉴턴의 절대공간이 아닌, 네 방위Gegend, 곧 땅, 하늘, 죽을 자들, 신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사방das Geviert세계에 사물을 위치시킨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는 주체를 생존 욕구나 자아실현 욕구와 같이 앞을 지향하는 서사방위와, 환경, 사랑이나 우정, 공존, 공감 등과 같이 옆을 지향하는 서정방위, 그리고 도덕이나 종교 등과 같이 위를 지향하는 영성방위로 이루어진, 3차원의 문학 공간 속에 위치시킬 수 있다. 실제 삶과 관련이 있으므로 수필공간으로 좁혀서 생각해도 되겠다. 삶에서 방위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조화로운 방위성을 실천할 때 이상적인 삶이 구현되기 때문이다.

 

삶의 주체는 무엇보다 장소다. 하지만 하나의 장소로 귀속되지는 않는다. 닫혀 있는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사건화하고 열려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사회가 부과하는 방위성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방위성을 개시한다. 사회가 부과하는 방위성은 자신의 방위성을 개시하는 데 커다란 제약으로 작용한다. 이 두 방위성은 보통 갈등 관계에 있다. 주체는 저마다 다른 존재의 토포로지에서 사회적 방위성에 대응한다.

 

그렇다면 현대의 사회적 방위성은 어떤 상태에 있을까? 서양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중세는 신 중심 사회였다. 그러니까 영성방위가 절대 우위를 점한 시대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17~18세기 실증주의와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역사가 무한히 발전할 거라는 진보사관이 태동한다. 또한 니체는 철학적으로 신의 죽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근대로 접어들면서 영성방위가 약화되고 서사방위가 강화되는 쪽으로 방위성이 바뀌게 된다. 여기에 자본주의가 가세하여 교환체제를 보급하고 기술혁명으로 그 흐름을 가속화한다. 현대는 절대화된 서사방위에 영성방위와 서정방위가 예속된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가 자신의 조화로운 방위성을 개시하고 유지하려 해도 매우 어려운 시대라는 말이다.

 

 

 

 

서정의 위기

 

앞의 가치가 절대화되면, ‘함께’를 중시하는 옆의 가치나 생명의 존엄성과 관련이 있는 높이의 가치가 쉽게 수단화된다. 환경이나 생태계는 물론 인성까지도 파괴된다는 말이다.

 

서정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대의 파시즘은 두말할 나위 없이 속도다. 이미 종교가 되어버린 자본주의는 유행mode이란 의례를 치르면서 속도를 숭배하고 예찬한다. 속도는 공간을 압축하고 무화시킨다. 우리는 서울에 있는 사람과 부산에 있는 사람이 어떤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고 통화가 가능한 동시성 시대에 살고 있다. 속도는 멈춰 서서 옆을 보는 걸 가로막는다. 운전하고 가면서,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차분히 옆을 보는 게 불가능하다. 심지어 공간이 무화된 동시성의 세계에서는, 옆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더 빨리, 더 많이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기를 쓰고 앞만 보고 내달리는가.

 

 

 

서정의 위기, 문학의 위기, 더 나아가 삶의 위기이다.

 

고통 받는 사람은 동정보다도 그저 누군가 곁을 지켜주기를 원한다. 그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타인의 가까움, 즉 근접성이다. 연민compassion은 서정에서 나온다. 그것은 함께com고통passion을 나누는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움베르트 마투라나는 ‘일상생활에서 내 옆에 남을 받아들이는 일’로 사랑을 규정한다. 그렇다. 서정의 근본이념은 사랑이다. 하지만 우리는 속도로 인해 옆을 상실해간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 얼마나 목표에 빨리 도달하느냐, 얼마나 많이 성취하느냐, 그런 것들만 중요한 게 아니다. 그건 제 앞만 보고 사는 삶이다. 얼마나 두껍고 밀도 있게 타자와 더불어 사느냐도 중요하다. 장수長壽뿐 아니라 후수厚壽도 추구해야한다는 말이다.

 

 

 

서정의 과제

 

위기와 죽음, 종말을 말하는 담론이 넘쳐난다. 삶의 방위성과 연관지어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정방위과 영성방위의 에너지 준위가 매우 낮은 상태로 떨어졌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도 있게 마련이다. 그 지점이 곧 시작하는 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망 속에도 서정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야만 한다.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충동처럼 무한히 반복하면서 앞으로만 내달리는 현대 사회의 속도에 제동을 거는 기능이, 옆을 지향하는 서정에 있기 때문이다. 슬로시티를 지정하고, 걷기를 권장한다고 해서, 사회의 속도가 늦춰지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은 일종의 문화상품일 뿐이다.

 

사회적 방위성은 구성원들의 방위성 평균치에 따라 변화한다. 이는 사회적 방위성을 바꾸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동참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절대화된 서사방위를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우리 모두가 서정적 태도를 배양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영성도 함양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방위성은 인간의 욕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은 어떤 대상을 자발적으로 욕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욕망의 대상을 스스로 선택하는 안목과 용기가 없으면, 너와 나는 서로 앞서려는 경쟁 상태에 빠지게 된다. 지라르는 우리가 욕망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이런 매개된 욕망에서 벗어날 것을 권고한다. 옆을 보는 데도 이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보다 근본적이고 긴요한 과제는, 욕망이 옆으로도 균형 있게 향하도록, 사회적 가치관을 바꾸는 일이다. 이성과 함께 작동하는 인문적 서정, 곧 최민자의 서정이 이 시대에 요청되는 이유이다.

 

 

 

세상을 敍情愛로 껴안는 조용한 혁명가     

 최민자 수필가는 자신만의 확고한 문학의 세계를 구축한 수필계의 자랑스러운 아이콘이다. 수필계에 입문한 사람 중에 그의 텍스트를 교재 삼아 공부한 사람도 꽤 많을 것이다. 이미 일가를 이룬 이 수필가에 대해 쓰려니 사실 조금은 부담스럽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영광스러운 생각도 든다. 부디 나의 글이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최민자 수필가는 등단 연도로 보나 나이로 보나 나의 선배다.  그럼에도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존칭을 생략하고, 대명사가 필요할 경우 그녀가 아닌 그를 사용하겠다.

 

 

 

필자와의 인연은 약 1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두 번째 작품집을 막 낸 즈음인데, 아는 수필가가 극히 적어 낯설어 하는 나를 참으로 알뜰히 챙겨주었다. 내 책을 여기저기 소개해주고, ⟪에세이문학⟫에 나의 작품 세계를 조명해주기까지 하였다.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고 한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낮은 담을 사이에 둔 이웃 같았다. 담 너머로 건네는 그의 호의와 인정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웃이라고 한 건 무엇보다 글의 스타일이 비슷해서다. 사물을 중심에 두고 서정성을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나에 앞서 대부분 수필가가 가려하지 않는 길을 외롭게 걸어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차이도 존재한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서로의 작품에 대해 격의 없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최 수필가는 자신보다 내가 시 쪽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고 했다. 또한 파격이 많은 나의 글과 달리, 가능한 수필의 형식을 지키려 노력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다고 ⟪손바닥 수필⟫에서 보듯 실험정신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행여 금이 갈세라 수필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다. 사실 그는 조용한 혁명가다.

 

최 수필가는 늘 수필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 점이 매번 나를 감동시킨다. 6년 전쯤이었을까? 우연히 그의 글이 원로 시인의 눈에 띄어 시 전문지 두 곳에서 수필 특집을 마련한 적이 있었다. 수필의 성과와 수준을 수필계 밖에 홍보할 절호의 기회다 싶어, 나를 포함한 몇몇 수필가를 동참케 하였다. 최 수필가는 수필의 명예와 자존심이 걸린 일이니 좋은 작품을 보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한 곳은 대표작이 아닌 신작을 원했는데, 하필 마땅한 글감이 없을 때였다. 좋은 글을 보내지 못해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았다. 지금도 권위 있는 종합문예지에서 원고청탁이 오면, 수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심초사한다. 이는 순전히 최 수필가가 나에게 일깨워준 교훈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수필 르네상스는 수필이 시나 소설과 동등한 지위, 또는 그 이상을 확보했을 때에야 비로소 도래한다고 믿는다. 수필계 내에서만 소위 ‘지지고 볶으며’ 건배사를 외치는 걸 싫어한다. 지금까지 대형출판사에서 주목하는 수필가가 없었음을 못내 애석해한다. 체념한 채 수필이란 울타리 안에서만 갇혀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한다.

 

최 수필가는 늘 시대성을 의식한다. 그래서 현재의 독자는 물론 미래의 독자까지도 염두에 둔다. 짧은 글을 선호하고 전자책을 내는 것도 매체 환경을 고려한 결과다. 최근에 나온 ⟪꿈꾸는 보라⟫에 수필집 최초로 QR 코드를 도입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글은 참으로 독특하다. 사실 언제 어디서든 글은 쓰여지게 마련이다. 바람 같은 덧없는 열망에 의해. 누구에 의해서? 누가 쓴들 무슨 대수이겠는가. 언어는 주인이 따로 없는데. 글은 그저 쓰여질 뿐이다. 하지만 그의 글은 놀랍게도 스스로 이름표를 달고 나온다. “이건 최민자 수필이야!” 하고. 그만의 독특한 문체, 이를테면 하나의 ‘류’를 완성했다는 말이다.

 

최민자 수필가에 대해서 말할 때 서정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서정성을 대표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서정이 산문에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없다. 그저 시적 분위기가 감도는 글쯤으로 치부해버리는 것 같다. 게다가 문예수필의 경우, ‘서정수필’이니 ‘서사수필’이니 하는 용어들이 무분별하게 사용돼, 혼란만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글에 사건이나 행위의 연쇄, 곧 서사성만 있으면 서사수필로 분류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알다시피 서사성이 있다고 해서 모두 서사수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발표되는 거의 대부분의 그런 글들은 서사성이 있는 서정수필로 본다. 12매 내외라면 사실 서사수필은 쓰려고 해도 쓰기가 쉽지 않다. 요컨대 우열을 가리려는 게 아니라-무슨 우열이 있겠는가?-이 두 용어는 수필을 구분하는 데 명확한 변별점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제 서정을 시의 눈이 아닌 산문의 눈으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수필의 영토에서 국산화가 완료된 서정을 주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정성을 대표하는 최 수필가의 수필이, 서정의 큰 틀에서 어느 위치를 점하는지 살펴보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그런데 말하려는 바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서정에 대해 통념과는 다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고, 왜 서정이 이 시대에 중요한지도 말하고 싶어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서정을 적극 옹호하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피치 못하게 체계를 갖추어 다소 긴 글을 쓰게 되었다. 멍석을 깔아준 김에 굿한다고 본의 아니게 춤을 추게 되었다는 말이다. 최민자 수필가를 보다 깊게 이해하고, 산문의 서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글은 계간 《수필미학》2019년 가을호에 기획특집으로 최민자 선생의 <작가 집중 탐구>에 실린 글이다. 평소 최민자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내게 많이 공감 되는 내용이라 퍼왔다. 어떻게 하면 최민자 작가처럼 지적이면서 비판적 은유를 더한 서정적이기까지 한 수필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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