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하나님은 아를 지키시는 분
- 인은하 봄비
- 비발디 사계
- 홍이삭 찬양 모음
- 꽃보다 예쁜 그대 미소
- 김윤진 찬양
- 달고나 커피 만들기
- 히즈윌 찬양모음
- '피아노 소나타 K331 '3악장
- 봄의 소리 왈츠
- 모자르트교향곡34
- 사계 '봄'
- '피아노 소나타 K331 '1악장
- 한웅재 찬양 모음
- 장사익 봄비
- 첫눈 향수
- 시와 그림 찬양
- 버스커버스커 노래 모음
- 이동원노래모음
- 영화 밀회
- 브람스 클라라
-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 F장조 "봄" 작품번호 24
- 슈만 클라라
- '피아노 소나타 K331 '2악장
- 켈라그라피
- 베토벤운명 교향곡
-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 한웅재 / 소원
- 브람스 향곡 1번
- Ain't No Sunshin
- Today
- Total
문혜정 green time
국의 지성 한샤오궁과의 대담/정희승 본문
중화권에서는 수필보다는 산문이란 용어를 더 선호한다고 들었습니다. 수기처럼 비교적 수준이 낮은 글에 수필이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이 말은 곧 수필이란 용어의 기원이 홍매의 『용재수필(容齋隋筆)』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수필의 기원이 될 수 없다는 의미지요. 중문학자가 밝혀주어야겠지만, 당연히 중국에서는 한 장르의 기원으로서 용재수필을 평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수필이란 용어에, 그리고 홍매에 전혀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더불어 제도와 엇물려 있지만(수필가는 자연스러워도, 산문가는 왠지 조금 이상합니다) 꼭 수필이란 용어를 고집해야하는지, 그 점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산문을 좋아한다면 다음 대담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자긍심을 느낄 것입니다.
왜 작가들이 산문에 주시할까
― 중국의 풍부한 문화유산 중에는 우수한 전통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문사철을 나누지 않는 것이죠. 선생의 『암시』를 읽다가 문득 문사철 통일의 전통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전통으로 인해서인지, 중국 문학의 문체는 매우 특별합니다. 산문이나 장회체(章回體) 소설이 특히 그렇고요.
한샤오궁 : 내 생각에 중국의 가장 큰 문체 유산은 산문입니다.
― 저도 동감입니다. 현대산문은 고대 산문과 개념이 다르죠.
한샤오궁 : 고대 산문은 ‘대산문(大散文)’입니다. ‘잡문학(雜文學)'이라고도 할 수 있죠. 문학일 뿐 아니라, 역사이자 철학이며 심지어 과학이기도 합니다. 중국은 농경민족입니다. 고인은 식물을 재료로 잘 이용했어요. 서한(西漢) 초기에 초목으로 종이를 발명했죠. 사실 채륜(蔡倫) 훨씬 전부터 종이가 있었습니다. 간수(甘肅) 둔황(敦煌) 등지에서 출토된 문물이 그 증거입니다. 종이가 있었으니 생각이나 느낌을 쓸 수 있었죠. 뭐든 말하고 서술하다보면 의미가 생깁니다. 그래서 고대 산문이 형성된 것이죠. 농업이 없다면 종이도 없었고, 종이가 없으면 산문도 없었다, 그런 과정입니다. 그로 인해 중국문예는 다른 민족과는 다른 발전경로를 겪었습니다. 적어도 십육 세기 이전까지는 그랬죠. 예를 들어, 고대 유럽의 문예형식은 처음에는 서사시였고 나중에는 극이었습니다. 모두 구전을 주요 수단으로 삼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종이가 아랍에서 유럽으로 들어온 것이 십이 세기 이후였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서한과는 천여 년의 시차가 있죠. 제가 시골에 있을 때 지방 연예인들이 ‘차오즈시(喬仔戱)’를 극본 없이 공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강의 줄거리가 연예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수되는 거였습니다. 유럽의 고대문인과 상황이 비슷하다 할 수 있죠.
― 고대 유럽에도 종이는 있었죠. 주로 양피지였지만요.
한샤오궁 : 상이집트(Upper Egypt)인이 발명한 ‘초지(草紙)’, 즉, 풀잎으로 만든 종이가 유럽에 전해지긴 했지만 후속적인 진전이 없었어요. 광범위하게 진파되지도 않았고요. 왜 그런지 모릅니다. 양피지는 동물지(動物紙)죠. 비싸고, 무겁고, 쓰기도 불편했기 때문에, 고대 유럽에서는 문자사용을 제한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 당시 그들에게 ‘문학’은 결여되었고 ‘극예술’이 많았죠. ‘문인’보다 ‘연예인’이 많았습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유럽은 중국의 시가와도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노래를 중시했고, 중국은 주로 시를 지었죠. 노래는 시를 입으로 부른 것이고, 시는 노래를 쓴 것입니다. 노래는 자연스레 희극을 끌어냈고, 시는 산문을 발육시켰습니다. 『시경』을 보면 대부분의 작품이 노래를 채취해서 만든 시입니다. 훗날 한대 악부(樂府)도 마찬가지죠. 단시와 송사로 오면 한층 더 문인화, 서면화됩니다. 티베트와 몽골의 유목지구를 빼면 중국엔 서사시가 출현한 적이 없는데, 사실 그건 사가(史歌)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역사는 모두 종이에 써서 『사기』나 『한서』가 됐기 때문에, 가수들이 애써 외워서 입으로 부르지 않아도 됐거든요. 후난 묘족 지구에서 어떤 가수가 사가를 부르는 걸 들었는데, 과연 사시와 조금 비슷하더군요. 하지만 중국의 주류적 현상은 아닙니다.
― 현대 산문의 원류로는 영국의 수필과 중국의 고대산문이 있습니다. 예전에 저우쭈어런은 만명(晩明) 소품(小品)의 영향을 비교적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바로 언지파(言志派)의 산문의 영향이죠.
한샤오궁 : 이십 세기에 이르러 중국은 서양의 어떤 문예양식을 배웠습니다. 연극, 영화, 유럽식 소설, 계단시(계단처럼 층층이 쌓아올리듯 행을 배열하는 시-옮긴이) 등등 그 종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어요. 하지만 서양의 산문은 사람들에게 그리 낯설지 않았습니다. 유사한 것이 중국에 수레 몇 대에 실을 정도로 많았으니까요. 모든 중국 신문에는 문화면이 있습니다. 주로 산문을 발표하는 곳입니다. 아주 특색 있죠. 구미 신문에는 대체로 서평란이 있고, 나중에 연예면이 생겼습니다만, 산문면은 보지 못했어요.
― 현대 산문의 발생과 발전은 신문 문화면의 흥성과 관계되어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한샤오궁 : 장청즈, 스타에성 같은 작가는 예전에 모두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소설을 썼습니다. 자유자재로 거리낌 없이 써댔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손을 싹 씻고는 삼백육십 도 전환하여 쉴 새 없이 산문을 써대는 겁니다. 장청즈가 하는 말이, 소설은 타락한 형식이랍니다. 옛날 루쉰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몰라요. 루쉰도 초기에는 소설을 좀 썼지만 후기작품은 거의 산문이거든요. 물론 저는 소설이 멸망할거라고는 생각 안 합니다. 오히려 앞으로도 많이 생기기를 바라죠. 다만 저의 관심거리는, 왜 내가 아끼는 이런 우수한 작가들이 산문에 주목할까, 그것이 말하는 의미가 뭘까 하는 겁니다. 중국의 산문 유산 속에는 풍부한 글쓰기 경험과 특수한 인문 전통이 들어 있습니다. 멋대로 던져버릴 수 없죠. 그건 중국 문화유산뿐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에 대해서도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 전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산문은 지식인의 감정과 사상을 가장 자유롭고 소박하게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지금 많은 작가가 산문을 쓰는 현상은 그들이 지식인이라는 신분과 관계가 있습니다.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지식인은 결국 공공영역의 사상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혀야 하거든요. 산문이라는 문체를 선택한 것은 필연적입니다. 러시아 지식인들도 그런 때가 있었죠. 그래서 저는 산문가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산문과 희극은 중서문학의 서로 다른 전통 원류
한샤오궁 : 저는 ‘자유’와 ‘소박’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어떤 글에서 저는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산문은 산보처럼 일상적이고 소박하고 나아가 적나라하지만, 소설과 희곡은 발레나 우주대원의 걸음처럼 기술적이라고요. 여기서 말하는 소설은 유럽 식 소설이고, 그 전신은 극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시학』은 사실 『극학劇學』이죠. 번역자가 당시 ‘시’가 바로 극, 특히 비극인 걸 몰랐던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시’에 여섯 개의 원칙을 규정했습니다. 인물, 줄거리, 주제, 대사, 배경, 노래. 여기에 무슨 ‘시’가 있습니까? 분명히 극이죠. 이 여섯 가지 요소는 대체로 훗날 유럽 소설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는 소설이 극본의 적자라는 사실, 즉 일종의 ‘포스트희곡문체’임을 말해주죠.
고대 그리스인들은 규범과 합리성을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책에서 극의 규범을, 마치 무슨 매뉴얼처럼 총 정리했어요. 이를테면 한 번 출연 시간은 어느 정도며, 합창과 서곡은 얼마만큼 있어야 하고 무대에서는 최대 세 명만이 말할 수 있다는 등, 모두 설명을 붙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악인이 악한 일을 하는 것은 관중을 놀라게 할 수 없다. 그러니 악인이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선인이 착한 일을 하는 것도 놀랍지 않으니 선인도 나쁜 일을 해야 한다, 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장 좋은 비극은 대체로 가족 관계에 원한 이 생기거나, 원한관계 속에서 사랑이 싹트는 것이며, 그런 극이야말로 관중의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런 규정 속에서 우리는 아주 쉽게 세익스피어, 입센, 코르네이유(Pierre Corneille Dumas, 1606~1684)를 떠올리게 됩니다. 발자크, 위고, 디킨즈, 뒤마, 그리고 5ㆍ4운동 이후 중국의 복제품들을 연상시키죠. 이 소설가들은 모두 고대 희랍 비극의 후계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생으로서, ‘포스트희곡’적 방식을 계승하여 감성과 생활을 표현했습니다.
― 선생의 『마챠오사전』과 『암시』가 문단에 등장한 후 줄곧 논쟁 속에 휘말렸습니다. 이 두 책은 그야말로 선생이 말한 유럽식 소설과는 영 딴판이거든요.
한샤오궁 : 중국 대륙 출판사들은 『암시』를 ‘소설’로, 타이완 출판사에서는 ‘필기체 소설’로 규정했습니다. 반대는 안 합다. 어떤 사람은 이런 문체는 절대 소설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 말에도 반대는 안 합니다. 소설의 개념이 원래부터 통일된 적이 없으니까요. 유럽의 전통 소설이 ‘포스트희곡’이라 한다면 중국의 소설은 ‘포스트산문’입니다. 양자는 걸어온 길이 다르고 개념도 다릅니다. 중국의 고대는 산문슈퍼대국입니다. 고인들은 대부분 ‘문예는 규칙이 없다(文無定規)’거나 ‘문에는 법이 없다(文無定法)’는 말을 믿었죠. 대체로 자연에 순응하고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썼습니다. 이런 산문의 껍질을 벗고 나온 소설은 처음에는 필기(筆記), 화본(話本)으로 불리다가 나중엔 장회소설(章回小說)이라 불렀습니다. 말하자면 산문이 이야기화, 구어화, 대중매체화한 것이죠.
『삼국연의』는 『삼국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소설도 처음에는 산문형식을 띠었죠.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당대(唐代)에 대량으로 나온 전기화본(傳奇話本)을 보면, 산문과 소설의 경계를 거의 구분하기 힘듭니다. 명, 청대 고전 장편소설 중 『홍루몽』처럼 비교적 유럽식 원근법에 근접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하나같이 ‘신티엔여우(信天游’(중국 샨베이(陜北) 민가 곡조의 일종-옮긴이), ‘스파처(十八?)’ (경극의 캐릭터 중의 하나-옮긴이), ‘창텅지에과(長藤結瓜)’ 등,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자유분방함의 흔적이 있습니다. 『경화연(鏡花緣)』『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다 마찬가지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식의 산개된 투시화법을 갖고 있습니다. 후스가 중국에 이렇게 많은 장편소설이 있는데도 진정한 장편소설이 없다고 개탄했던 건, 유럽 소설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포스트희곡’과 ‘포스트산문’의 양대 전통으로 나누는 것은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전통 속에 서로 다른 글쓰기 경험과 심리가 들어 있겠군요.
한샤오궁 : 희곡을 쓰는 것과 산문을 쓰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희곡은 인구가 집중된 곳에서만 생산됩니다. 반드시 창작집단의 합작을 거쳐서만 무대에 올려지죠. 반면, 산문은 편벽된 외지에서 생산됩니다. 적막 속에서 작가가 혼자 완성합니다. 희곡은 현장교류이며, 눈앞의 관중과 직접 대면합니다. 하지만 산문은 홀로 면벽해 있는 외로운 등불입니다. 훗날 독자가 생길지, 많을지, 적을지도 알 수 없죠. 희곡의 관중 중에도 독서인도 있고 문맹, 반문맹도 있습니다. 작가는 취향의 공공성을 고려해야 하지만, 독자는 독서인이거나 작가가 택한 ‘지음’일 테니, 취향의 독자성을 충분히 견지해도 되죠. 오랜 시간 ‘명산’에 묻히는 것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djEJs 의미에서 보면, 중서(中西) 문예전통의 차이는 바로 산문과 희곡의 차이에서 연원하는지도 모릅니다. 아테네와 로마에 그렇게 많은 극장이 있었어요. 심지어 작은 폼페이에도 여러 개가 있었으니까요. 중국 문인들에겐 아주 생소한 일이죠.
― 처지와 경험에 따라 치중하는 바가 다르군요.
한샤오궁 : 문예기능에 대한 인식 역시 크게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첫째로 ‘오락성’을, 둘째로 ‘교육성’을 강조했습니다. 중국말로 하면 ‘노는 데서 배운다(寓敎于樂)’입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을 보면서 극예술가들은 자연히 이런 서비스적 발상이 생겼을 겁니다. 반면, 중국의 고인들이 강조한 것은 첫째는 ‘시언지(詩言志)’, 둘째는 ‘가영정(歌詠情)’ 이었습니다. 고독하게 배회하는 문인의 발상이죠. 일종의 표현형 창작 주장입니다. 전자는 관능본위, 후자는 작가본위죠.
― 많은 사람들이 서양예술을 모방을 본으로 하고 중국예술은 비흥(比興)을 본으로 한다고 말했습니다. 왕위앤화 선생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샤오궁 : 사실, 모방이야말로 무대연극의 기본 동작체계입니다. 비흥은 종위 위에 시를 쓰는 주된 방법이고요. 나중에는 산문의 방법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 그렇다면 중국 전통연극은 어떻게 보십니까?
한샤오궁 : 중국에서는 연극이 비교적 늦게 출현했고, 그 내원은 곡(曲)과 조(調)입니다. 이를테면, 휘극(徽劇) (중국 안후이성의 지방극- 옮긴이)은 휘조(徽調)에서 나왔습니다. 중국어로 희곡(戱曲)이라는 말에서 보이듯, 연극과 곡조는 친척관계죠. 이 희곡은 일반적으로 아주 강한 지방색, 시정성(市井性), 유희성을 띱니다. 문예의 주류이자 정통이었던 유럽 연극처럼 ‘제신(諸神)’과 ‘영웅’ 등 장엄한 제재를 표현하는 데 숙달되어 있지 못합니다. 민중들 사이엔 “책은 진짜고 희는 가짜다” 거나 “책은 아(雅)이고 희는 속(俗)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희곡은 그냥 노는 겁니다. 문인의 문에 그 지위는 비교적 낮았죠.『사고전서(四庫全書)』칠만여 권에 수록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 거기에도 연극은 없습니다. 만청 이후 ‘문인극(文人劇)’, ‘문명희(文明戱)’가 출현한 이래 1960년대 경극을 위시한 현대극 개혁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유럽 연극에 맞춰 중국 희곡이 개조되었죠.
출처: [산문 산책]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꿈 / 정희승 (0) | 2020.12.24 |
---|---|
감꽃 / 정희승 (0) | 2020.12.24 |
서정의 사회적 기능과 최민자 수필 / 정희승 (0) | 2020.12.23 |
무사한 나날들 / 김훈 (0) | 2020.12.22 |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 김훈 (0) | 2020.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