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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정 green time

소리 없는 것들의 슬픔 / 김경수 본문

좋은 시

소리 없는 것들의 슬픔 / 김경수

선한이웃moonsaem 2020. 12. 13. 15:26

 세상을 꼼꼼히 둘러보면

 세상 천지에 소리를 내지 못하는 생물들이 널려있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생물들의 슬픔을 안고

 아무리 정밀한 톱니바퀴가 시곗바늘을 돌리고 돌려도

 말 못하는 생물들의 슬픔을 다 표현할 수 없고

 사람들은 말 못하는 생물들을 밟고 지나간 바람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한다.

 바람이 지나가건 비가 오건

 살아있는 생물들의 슬픔은 그렇게 수없이 세포분열하였다.

 살아있는 것, 생각하는 것이 슬픔의 근원이었다.

 죽음에 이르는 가장 악성 병인病因인 슬픔에 감염되어도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매일 슬픔을 대하고 일상에서 슬픔에 대한 예방접종을 받는다.

 세월이 무심히 흐를 때

 언제나처럼 무심한 일들은 무심한 사건들을 출산出産하고

 사람들은 무심하게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마감한다.

 늙은 존재들을 인생의 종점으로 실어나르는 시간이라는 열차도

 무심히 매일 똑같이 운행되어지고 있었고

 아우슈비츠Auschwitz로 가는 열차처럼

 청소하는 열차가 도착하는 시각에 맞추어 늙은 존재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플랫폼에 줄지어 서있었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생물들의 한恨이 이 세상을 꽉 메운다.

 소리가 사라졌고

 살아있는 것들의 표현 양상인 소리의 밝은 빛깔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소리를 찾기 위해 눈들을 크게 뜨고

 피부에 닿는 촉감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생물들에게 살아있는 것이 슬픔의 근원이라고

 소리를 내는 생물들이 소곤대지만

 소리를 내는 생물들에게도

 소리를 내는 그만큼과 생각을 하는 그만큼의 불안이 혼합되어진

 더 큰 슬픔이 존재하였다.

 

 

 

 

지상의 함성과 대비되는 지하의 고요. 광화문 지하에는 ‘장애인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1500일을 넘긴 농성장이 있다. 그리고 농성장 앞쪽 통로를 따라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의 사진이 있다. 사진은 원래 말이 없지만 영정 사진이라 더욱 말이 없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질러댄 소리만 듣고 돌아왔던 첫 수업 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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