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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정 green time

바람의 식사법 /이종섶 본문

좋은 시

바람의 식사법 /이종섶

선한이웃moonsaem 2020. 12. 13. 15:49

바람은 흔들리는 것들만 먹고 산다

흔들리지 않으면 죽은 것이라는 감별법에 따라

무엇을 만나든 먼저 흔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끼니때마다 바람의 식탁을 차려야하는 나무는

잎사귀의 흔들림까지 바쳐야 하는 삶이 괴로워

바람도 불지 않고 흔들림도 없는 어두운 땅속에서

어린뿌리들의 두 손을 꼭 잡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떠나라고 재촉한다

가느다란 가지 하나 바람결에 흔들리기라도 하면

탈출계획을 들켜버린 듯 화들짝 놀라는 나무

아무 일 없다는 표정을 간신히 지을 수 있지만

땅속에서는 시커먼 흙을 움켜쥔 뿌리들이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서럽게 울고 있다

입맛을 더욱 돋궈주는 그 소리는

나무 하나 붙잡고 통째로 뜯어먹는 바람의 양념

뼈만 앙상한 나무에 다시 푸른 살이 오를 때까지

기나긴 허기를 달래줄 맑고 차가운 독을 품는다

뾰족한 잎사귀나 딱딱한 잔가지들까지

모조리 핥아먹어버리는 바람의 습성 앞에

발이 묶여있는 나무들이 벌벌 떤다

바람은 흔들림을 먹고 사는 짐승

흰 이빨에 맹독을 키우며 나무를 사육한다

바람의 아가리에 물리면 약도 없어

봄가을로 빨갛게 부어올랐다 가라앉는 자국들

푸른 멍이나 이빨자국을 남기며 아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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