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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정 green time

이해인 시인 시 본문

좋은 시

이해인 시인 시

선한이웃moonsaem 2021. 9. 7. 17:59

 

한 그루의 나무처럼

 

비바람을 견뎌내고 튼튼히 선 한 그루 나무처럼,

오늘이란 땅 위에 선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슬픔을 견뎌내야 조금씩 철이 드나 보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경험하고 터무니없는 오해도 받고,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면서 어둠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가볍지 않은 웃음을 웃을 수 있고,

다른 이를 이해하는 일도 좀더 깊이 있게 할 수 있나 보다.

 

 

가을편지

 

오늘은 가을 숲의 빈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흰구름을 바라봅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불볕처럼 타올랐던 나의 마음을 서늘한 바람에 식히며 앉아 있을 수 있는 이 정갈한 시간들을 감사합니다.

 

대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우리집 앞마당. 대추나무 꼭대기에서 몇 마리 참새가 올리는 명랑한 아침기도. 바람이 불어와도 흩어지지 않는 새들의 고운 음색. 나도 그 소리에 맞추어 즐겁게 노래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며 -

 

한 포기의 난(蘭)을 정성껏 키우듯이 언제나 정성스런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면 그것이 곧 기도이지요? 물만 마시고도 꽃대와 잎새를 싱싱하게 피워 올리는 한 포기의 난과도 같이, 나 또한 매일 매일 당신이 사랑의 분무기로 뿜어 주시는 물을,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신다면 그것으로 넉넉하지요?

 

기도서 책갈피를 넘기다가 발견한 마른 분꽃 잎들. 작년에 끼워 둔 것이지만 아직도 선연한 빛깔의 붉고 노란 꽃잎들.

분꽃 잎을 보면 잊었던 시어(詩語)들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정답게 내 이름을 불렀던 시골집 앞마당, 그 추억의 꽃밭도 떠오릅니다.

 

급히 할 일도 접어두고 어디든지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가을. 정든 집을 떠나 객지에서 바라보는 나의 모습, 당신의 모습,

이웃의 모습. 떠나서야 모두가 더 새롭고 아름답게 보일 것만 같은 그런 마음. 그러나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오늘을 더 알뜰히 사랑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네가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이의 눈 속에 출렁이는 그림 한 점, 샤갈의 <푸른 장미>.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이의 목소리 속에 조용히 흔들리는 선율, <G선상의 아리아>. 내게 이런 모든 것을 느끼도록 해 주신 당신의 크신 얼굴이 더 크게 살아오는 가을. 루오의 그림마다에서 당신의 커다란 눈들이 나를 부릅니다.

 

오늘은 길을 떠나는 친구와 한 잔의 레몬차를 나누었습니다. 이별의 서운함은 침묵의 향기로 차(茶) 안에 녹아 내리고

우리는 그저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서로의 평화를 빌어 주고 있었습니다. 정든 벗을 떠나 보낼 때는 언제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헤어질 때면 더욱 커 보이는 그의 얼굴. 손 흔들 때면 더욱 작아 보이는 나의 얼굴.

 

새벽에 성당 가는 길엔 푸른 색 나팔꽃 한 송이와 꼭 마주치게 됩니다. 그 꽃이 나를 바라보듯이 내가 그 꽃을 바라보듯이그렇게 유순하고 사심(私心) 없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게 하여 주십시오.

 

귀뚜라미 노래소리에 깊어 가는 가을밤. 내 피곤한 육신을 맨땅에 눕히듯이 작은 나무 침대 위에 눕히면, 오랜만에 달고 싱싱한 사탕수수 같은 나의 꿈과 잠. 꿈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긴 여행을 합니다. 꿈꾸는 것조차도 당신 안에선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보름달 속에 비치는 당신의 빛나는 모습. 달처럼 차고 또 기우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달빛에게 세례받은 하얀 박꽃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당신을 기억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 또한 당신의 넓은 하늘에서 하나의 달이 되어 뜰 때까지.

 

가을엔 가장 작은 들꽃의 웃음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남 몰래 앓고 있는 내 이웃의 작은 아픔까지도 깊이 이해하며 그를 위한 나의 눈물이 기도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15년 전부터 내가 아껴 쓰던 열두 빛깔의 색연필을 깎아 이 글을 씁니다. 이 연필들이 나의 손에 길들여져 조금씩 닳아 가듯이 나 또한 당신에게 길들어지며, 담백한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가을엔 내가 잠을 자는 시간조차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좀더 참을 걸 그랬지, 유순할 걸 그랬지.' 남을 언짢게 만든 사소한 잘못들도 더 깊이 뉘우치면서 촛불을 켜고 깨어 있어야만, 꼭 그래야만 될 것 같은 가을밤. 당신 안에 만남을 이룬 이들의 착한 얼굴들을 착한 마음으로 그려 봅니다.

 

가을 길에 줄지어 선 코스모스처럼 내 마음 길에 수없이 한들대는 시심(詩心)의 꽃잎들. '따지 말고 그냥 두면 더한 아름다움일 것을'- 이러한 생각이 시 쓰는 나를 괴롭힐 때가 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가을엔 지는 노을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조심스런 눈빛으로 매일을 살아 갑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저 노을처럼 짧게 스쳐 가는 황홀한 순간과, 보다 더 긴 아타까움의 순간들을 남겨 놓고 떠납니다.

그러나 오십시오. 아름다운 당신은 오늘도 저 노을처럼 오십시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삶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이 가을엔 꼭 찾아 얻게 하소서. 꽃이 죽어서 키워낸 열매, 당신이 죽어서 살려낸 나, 가을엔 이것만 생각해도 넉넉합니다.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우산도 채 받지 않고 길을 가는 이들의 적막한 얼굴 속에서 나는 당신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삶은 비애를 긋고 가는 한 줄기 가을비일까」혼자서 나직히 뇌어보며 오늘은 더욱 당신이 보고 싶고, 당신을 닮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한(恨)과 눈물이 서린 듯한, 그러나 나를 낳아 준 모국의 정든 산천. 하루도 근심이 끊이지 않는 그녀의 쓸쓸한 이마를 보면 눈물이 핑 돕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인해 살아서도 이미 죽음의 순간을 맛보는 나의 이웃들을 지금은그 아무도 위로해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왜 그토록 힘이 없어 보입니까.

 

오늘은 빨갛게 익은 동백 열매 하나 따 들고 언덕을 오르며, 당신을 향한 나의 그리움 또한 이 작은 열매처럼 하도 잘 익어서'툭' 하고 쪼개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고추잠자리 한 마리 내 하얀 머리수건 위에 올려 놓은 바람. 그리고 손에 쥐어 보는 유리빛 가을 햇살.

잠자리 날개의 무늬처럼 고운 설레임으로 삶을 더욱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당신의 가을 햇살 - 잊지 못합니다.

 

사랑할 때 우리 모두는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기다림에 깊이 물들지 않고는 어쩌지 못하는 빨간 별,

별과 같은 가슴의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버리기 아까워 여름 내내 말린 채로 꽂아 둔 장미꽃 몇 송이가 말을 건네 옵니다. "우린 아직 죽은 게 아니어요."

그래서 시든 꽃을 버리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함을 깨닫는 아름다운 가을의 소심증.

 

세수를 하다 말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문득 놀라워서 들여다보는 대야 속의 물거울. '오늘을 더욱 사랑하며 살리라'는 맑은 결심을 합니다. 그 언제가 될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나의 마지막 세수도 미리 기억해 보며,

차갑고 투명한 가을 물에 가장 기쁜 세수를 합니다.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 보듯이 -

 

노을을 휘감고 묵도하는 11월의 나무 앞에 서면 나를 부르는 당신의 음성이 그대로 음악입니다. 이별과 죽음의 얼굴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 가을의 끝. 주여, 이제는 나도 당신처럼 어질고 아프게 스스로를 비우는 겸손의 나무이게 하소서.

아낌없이 비워 냈기에 가슴 속엔 지혜의 불을 지닌 당신의 나무로 서게 하소서.

 

깊은 밤, 홀로 깨어 느끼는 배고픔과 목마름. 방 안에 가득한 탱자 향기의 고독. 가을은 나에게 청빈을 가르칩니다.

대나무처럼 비우고 비워 더 맑게 울리는 내 영혼의 기도 한 자락. 가을은 나에게 순명을 가르칩니다.

 

가을이 파 놓은 고독이란 우물가에서 물을 긷습니다. 두레박 없이도 그 맑은 물을 퍼 마시면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지난 여름 내 욕심의 숲에 가려 아니 보였던 당신 모습도 하나 가득 출렁여 오는 우물.

날마다 새로이 나를 키우는 하늘빛 고독의 깊이를 나는 사랑합니다.

 

여름의 꽃들이 조용히 무너져 내린 잔디밭에 작은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새도 즐기는 이른 새벽의 침묵의 향기 - 새의 명상을 방해할까 두려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로 비켜 갔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당신을 쉬게 하고 싶습니다. 피곤에 지친 당신을 가을의 부드러운 무릎 위에 눕히고,

나는 당신의 혼(魂) 속으로 깊이 들어가 오래오래 당신을 잠재우는 가을바람이고 싶습니다.

 

가을엔 언제나 수많은 낙엽과 단풍의 이야기를 즐겨 듣습니다. 페이지마다 금빛 지문(指紋)이 찍혀 있는

당신의 그 길고 긴 편지들을 가을 내내 읽고 또 읽듯이 -

 

풀벌레 소리에 잠이 깨는 가을밤. 머리맡에 놓인 성서를 펼쳐들면 귀에 익어 더 반가운 당신의 음성.

오직 당신으로 하여 오늘도 푸성귀처럼 푸르고 싱싱해진 이 마음의 뜨락에 당신은 어서 주인으로 오십시오.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 빗속에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은 꼭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내 마음의 창을 열고 조용히 들어서는 당신의 그 낮은 목소리. 비가 와도 비에 젖지 않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따뜻한 목소리. 그보다 더한 음악이 아직은 내게 없습니다.

 

바람 부는 들녘, 저마다의 자리에서 유순한 얼굴로 꽃들이 일어섰습니다. 뜨거운 여름의 불길을 지나 더욱 단단해진 믿음의 보석 하나 빛나는 첫 선물로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의연한 눈빛으로 일어서야겠습니다.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감꽃의 그 얼굴도 떠올리면서, 조그만 불덩이 하나 입에 넣듯이 감을 먹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가시 박힌 아픔을 잘 익은 말로 삭혀 주던 어느 사제의 모습도 떠올리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이해인 -한 방울의 그리움-

 

마르지 않는
한 방울의
잉크빛 그리움이
오래 전부터
내 안에 출렁입니다

지우려 해도
다시 번져오는
이 그리움의 이름이
바로 당신임을
너무 일찍 알아 기쁜 것 같기도
너무 늦게 알아 슬픈 것 같기도

나는 분명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을 잘 모르듯이
내 마음도 잘 모름을
용서받고 싶습니다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

 

나도 나무가 되리라.

자기가 서야 할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서서

사계절의 변화에

적응하는 나무처럼

 

나도 인생의 사계절을

다 받아들여 적응할 줄 아는

성실한 시의 나무,

기도의 나무가 되리라.

 

 

가을 노래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며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는 꽃 웃음에 취해도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풀벌레이고 싶어요

별빛을 등에 업고

푸른 목청 뽑아 노래하는

숨은 풀벌레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의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

 

 

 

겨울이 잠든 거리에서

 

앞 사람이 남기고 간 외로움의 조각들을

살얼음처럼 밟고 가면 나도 문득 외로워진다.

아이들이 햇빛과 노는 골목길에서

경이로운 봄을 만난다.

조무래기들이 흘린 웃음을 받아 가슴에 넣고

겨울이 잠든 거리에 기쁨의 씨를 뿌리며 걷고 싶다.

 

 

 

고독을 위한 의자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 속에 헤아려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구름의 노래

 

1

구름도 이젠

나이를 먹어 담담하다 못해

답답해졌나?


하늘 아래

새것도 없고

놀라울 것도 없다고

감탄사를 줄였나?


그리움도 적어지니

괴로움도 적어지지?


거룩한 초연함인지

아니면 무디어서 그런 건지

궁금하고 궁금하다


대답해주겠니?


2

나의 삶은

당신을 향해 흐르는

한 장의 길고 긴

연서였습니다


새털구름

조개구름

양떼구름

꽃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여러 형태의 무늬가 가득하여

삶이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오늘도 나는

열심히 당신을 찾고 있군요

내 안에는 당신만 가득하군요


보이는 그림은 바뀌어도

숨은 배경인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고


나는 구름으로 흐르며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길 위에서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없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길이 된다


내게 잠시

환한 불 밝혀주는

사랑의 말들도

다른 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와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슬픔도


일을 하다 겪게 되는

사소한 갈등과 고민

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


살아갈수록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나 자신에 대해 무력함도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오늘도 몇 번이고

고개 끄덕이면서

빛을 그리워하는 나


어두울수록

눈물날수록

나는 더

걸음을 빨리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새들도 쉬러 가고

사람들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겸허한 시간

욕심을 버리고 지는 해를 바라보면

문득 아름다운 오늘의 삶

눈물나도록 힘든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견디고 싶은 마음이

고마움이 앞서네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래야 내일의 밝은 해를 볼 수 있다고

지는 해는 넌즈시 일러주며 작별 인사를 하네

 

 

청소 시간

 

날마다

먼지를 쓸고 닦는 일은

나를 쓸고 닦는 일


먼지 낀 마음 말끔히 걸레질해도

자고 나면 또 쌓이는

한 웅큼의 새 먼지


부끄러움도 순히 받아들이며

나를 닮은 먼지를

구석구석 쓸어낸다


휴지통에 종이를 버리듯

내 구겨진 생각들을

미련 없이 버린다


버리는 일로 나를 찾으며

두 손으로 걸레를 짜는

새 날의 시작이여

 

 

 

침묵에게

 

내가 행복할 때에도

내가 서러울 때에도


그윽한 눈길로

나를 기다리던


바위처럼 한결같은 네가

답답하고 지루해서

일부러 외면하고

비켜서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네 어깨너머로 보이는

저 하늘이

처음 본 듯 푸르구나


너의 든든한 팔에 안겨

소금처럼 썩지 않는

한 마디의 말을 찾고 싶다


언젠가는 네 품에서

영원한 잠을 자고 싶다

침묵이여

 

 

풀물 든 가슴으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

풀빛으로 노래로

물드는 봄


겨우내 아팠던 싹들이

웃으며 웃으며 올라오는 봄


봄에는

슬퍼도 울지 마십시오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 내려오는

저 푸른 산이 보이시나요?


그 설레임의 산으로

어서 풀물 든 가슴으로

올라가십시오

 

 

 

11월에

 

나뭇잎에 지는 세월

고향은 가까이 있고

나의 모습 더없이

초라함을 깨달았네


푸른 계절 보내고

돌아와 묵도하는

생각의 나무여


영혼의 책갈피에

소중히 끼운 잎새

하나 하나 연륜 헤며

슬픔의 눈부심을 긍정하는 오후


햇빛에 실리어 오는

행복의 물방울 튕기며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조용히 겨울을 넘겨보는

11월의 나무 위에

연처럼 걸려 있는

남은 이야기 하나


지금 아닌

머언 훗날


넓은 하늘가에

너울대는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별밭에 꽃밭에

나뭇잎 지는 세월


나의 원은 너무 커서

차라리 갈대처럼

여위어 간다

 

 

 

기도할 때 내 마음은

 

1

기도할 때 내 마음은 바다로 갑니다

파도에 씻긴 흰 모래밭의 조개껍질처럼 닳고 닳았어도

늘 새롭기만 한 감사와 찬미의 말을 한꺼번에 쏟아 놓으면

저 수평선 끝에서 빙그레 웃으시는 나의 하느님

2

기도할 때 내 마음은 하늘이 됩니다

슬픔과 뉘우침의 말들은 비가 되고

기쁨과 사랑의 말들은 흰 눈으로 쌓입니다

때로는 번개와 우박으로 잠깐 지나가는 두려움

때로는 구름이나 노을로 잠깐 스쳐가는 환희로

조용히 빛나는 내 기도의 하늘

이 하늘 위에 뜨는 해. 달. 별. 믿음. 소망. 사랑

3

기도할 때 내 마음은 숲으로 갑니다

소나무처럼 푸르게

대나무처럼 곧게 한 그루 정직한 나무로 내가 서는 숲

때로는 붉은 철쭉꽃의 뜨거운 언어를

때로는 하얀 도라지꽃의 청순한 언어를 피워 내며

한 송이 꽃으로 내가 서는 숲

사계절 내내 절망을 모르는 내 기도의 숲에 서면

초록의 웃음 속에 항상 살아 계신 나의 하느님

 

 

 

꽃밭에 서면

 

꽃밭에 서면 큰 소리로 꽈리를 불고 싶다

피리를 불듯이

순결한 마음으로


꽈리 속의 자디잔 씨알처럼

내 가슴에 가득 찬 근심 걱정

후련히 쏟아 내며

꽈리를 불고 싶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동그란 마음으로

꽃밭에 서면


저녁노을 바라보며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고 싶다


남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받고 싶다


꽃들의 죄없는 웃음소리

붉게 타오르는

꽃밭에 서면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내가 심은 꽃씨가

처음으로 꽃을 피우던 날의

그 고운 설레임으로


며칠을 앓고 난 후

창문을 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의

그 눈부신 감동으로


비온 뒤의 햇빛 속에

나무들이 들려주는

그 깨끗한 목소리로


별것 아닌 일로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던

친구와 오랜만에 화해한 후의

그 티없는 웃음으로


나는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못 견디게 힘든 때에도

다시 기뻐하고

다시 시작하여

끝내는 꽃씨를 닮은 마침표 찍힌

한 통의 아름다운 편지로

매일을 살고 싶다

 

 

 

나무의 자장가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는

나른한 여름


눈을 감아도

몸과 마음이

모아지지 않고

멋대로 흩어지는 오후


달디단 바람이 와서

가만가만 나를 달래며

잠들게 해줍니다

초록빛 나뭇잎들이

나무에서 내려와

자장가를 불러줍니다


나는 금방

초록빛 시원한

잠의 숲속으로 들어가

깨어날 줄을 모릅니다

 

 

내 마음의 방

 

혼자 쓰는 방안에서의 극히 단순한 '살림살이' 조차도

바쁜 것을 핑계로 돌보지 않고 소홀히 하면 이내 지저분하게 되곤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나의 방을 치우고 정리하는 일 못지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방을 깨끗이 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내 안에 가득찬 미움과 불평과 오만의 먼지, 분노와 이기심과 질투의 쓰레기들을

쓸어내고 그 자리에 사랑과 기쁨과 겸손, 양보와 인내와 관용을 심어야겠다.

내 방 벽 위에 새로운 마음으로 새 달력을 걸듯이 내 마음의 벽 위에도

'기쁨' 이란 달력을 걸어놓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능소화 연가

 

이렇게

바람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저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도 불타는

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머리를 빗듯

 

촘촘히 살이 박힌 빗으로 아침마다 머리를 빗듯

내 헝클어진 꿈들을 모두 일으켜 빗질하고 싶다.

허연 고뇌의 먼지도 말끔히 털어 내는 시간.

명주실처럼 탄탄하고 질긴 내 사랑의 올을

가지런히 빗겨 땋아놓고 싶다.

그러나 가늘게 날이 선 빗으로도 빗질할 수 없는 아픔,

빗겨도 말 안 듣는 아픔은 어떻게 해야 할까.

 

 

 

비가 전하는 말

 

밤새

길을 찾는 꿈을 꾸다가

빗소리에 잠이 깨었네


물길 사이로 트이는 아침

어디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와

나를 부르네

만남보다 이별을 먼저 배워

나보다 더 자유로운 새는

작은 욕심도 줄이라고

정든 땅을 떠나

힘차게 날아오르라고

나를 향해 곱게 눈을 흘기네


아침을 가르는

하얀 빗줄기도

내 가슴에 빗금을 그으며

전하는 말


진정 아름다운 삶이란

떨어져 내리는 아픔을

끝까지 견뎌내는 겸손이라고 -


오늘은 나도 이야기하려네

함께 사는 삶이란 힘들어도

서로의 다름을 견디면서

서로를 적셔주는 기쁨이라고 -

 

 

 

선인장의 고백

 

하나뿐인 사랑조차

고단하고

두려울 때가 있어요


황홀한 꽃 한 송이

더디 피워도 좋으니

조금 더 서늘한 곳으로

날 데려가주어요


목마르지 않을

지혜의 샘 하나

가슴에 지니고


이젠 그냥

그대 곁에서

조금 더 편히 쉬고 싶음을

용서해주어요

 

 

 

1

기다리다 못해

내가 포기하고 싶었던 희망


힘들고 두려워

다신 시작하지 않으리라

포기했던 사랑


신록의 숲에서

나는 다시 찾고 있네


순결한 웃음으로

멈추지 않는 사랑으로

신(神)과 하나 되고 싶던

여기 초록빛 잎새 하나


어느 날 열매로 익어 떨어질

초록빛 그리움 하나


2

꽃과 이별한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가며 행복한

나무들의 숨은 힘


뿌리 깊은 외로움을 견디어냈기에

더욱 깊이 뻗어가는 눈부신 생명이여


신록의 숲에 오면

우린 모두 말없는

초록의 사람들이 되네


사랑이 깊을수록

침묵하는 이유를

나무에게 물으며

말없음표 가득한

한 장의 편지를

그대에게 쓰고 싶네


어느새 숲으로 따라와

모든 눈물과 어둠을 말려주는

고마운 햇빛이여


잃었던 노래를 다시 찾은 나는

나무 같은 그대의 음성을

나무 옆에서 듣네


꽃에 가려져도 주눅들지 않고

늘 당당한 신록의 잎새들

잎새처럼 싱그러운 사랑을

우리도 마침내

삶의 가지 끝에

피워 올려야 한다고......

 

 

쓸쓸한 날만 당신을

 

기쁜 날보다는

쓸쓸한 날만

당신을 찾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주님


살아온 날들의 부끄러움이

노오란 수세미꽃으로

마음의 벽을 타고 오르는 날


가까운 이들로부터

따돌림받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날


사랑의 충고보다는

가시 돋힌 비난의 말들로

조금은 상처를 받는 날......


제 마음은

하늘 바다에

고요한 섬으로 떠서

눈물을 흘립니다


어느 때보다도

맑고 겸허한 기도를

구름으로 피워올립니다


쓸쓸한 날이 꼭 필요함을

새롭게 알려주시는

저의 노래이신 주님......

 

 

 

하루의 문을 닫으며

 

길을 가다가 내게 길을 물었던 어느 이웃의 둥근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전철에서 내게 자리를 양보했던 어느 이웃의 서늘한 눈매가 보이는 것 같다.

저녁이 되어, 하나 둘 불이 켜지는 이웃의 창마다 나는 기쁨의 종을 달아주는 님프가 되고 싶다.

집집마다 들어가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놓고 몰래 빠져나와

하늘의 별을 보고 깔깔 웃어도 보는 반딧불 요정이고 싶다.

멀리 있어도 집채로 내게 가까이 오는 수많은 이웃의 불 켜진 창을 보며

내 마음의 창에도 오색 찬란하게 타오르는 고마움의 불빛, 함께 있음의 복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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