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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시 본문

좋은 시

도종환 시인 시

선한이웃moonsaem 2022. 2. 6. 23:40

 

단풍드는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활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우기 

새 한마리 젖으며 먼 길을 간다

하늘에서 땅끝까지 적시며 비는 내리고

소리내어 울진 않았으나

우리는 많은날 피할 길 없는

빗줄기에 젖으며

남 모르는 험한 길을

많이도 지나왔다

하늘은 언제든 비가 되어

적실 듯 무거웠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둔 채

밤낮없이 흘러갔다

살다보면 배지구름 걷히고

하늘 개는 날 있으리라

그런날 늘 크게 믿으며

여기까지 왔다

새 한마리 비를 뚫고

말없이 하늘 간다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견우직녀도 이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접시꽃 당신

 

견우직녀도 이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 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건너 구름건너 한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사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다시 가을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 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을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웃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 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

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해인으로 가는 길 

  

가을은 어디 있다 오는 걸까

어떤 소식을 듣고 올까

어떤 모습으로 올까

다시 오는 가을

하늘도 바람도 꽃도

서늘한 맥박으로 뛰는데

지난해와 다른 것은 왜일까

그래도, 저 꽃을 보러

푸른 하늘의 저 구름을 보러

몸 부푸는 들판을 보러

점퍼 하나 사 입고

사뿐히 가봐야지

어서 오라고 손 잡아 봐야지

 

 

 

 

 

개울가에서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려고

고갯마루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가슴을 저미며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눈물 없이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벌판을 지나
벌판 가득한 눈발 속 더 지나
가슴을 후벼파며 내게 오는 그대여
등에 기대어 흐느끼며 울고 싶은 그대여

눈보라 진눈깨비와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쏟아지는 빗발과 함게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견딜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던 시간을 지나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인차리 


인차리를 돌아서 나올 때면
못다 이룬 사랑으로 당신이 내게
슬픔을 남기고 떠나갔듯
나 또한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때가 있음을 생각한다
사랑으로 인해 꽝꽝 얼어붙은 강물은
사랑이 아니고는 풀리지 않으리라
오직 한 번 사랑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확실히 살아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엔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번은 꼭 다시 만나야 하는 그날
우리 서로 무릎을 꿇고 낯익은 눈물 닦아주며
기쁨과 서러움으로 조용히 손잡아야 할
그 때까지의 우리의 사랑을 생각하는 때문이다
 

 

 

 
별 아래 서서  

별 하나 흐르다 머리 위에 머뭅니다.
나도 따라 흐르다 별 아래에 섭니다.
이렇게 마주보고 섰어도
늘상 건널수 없는 거리가 있습니다.
함께 사랑하고 기뻐한 시간보다
헤어져 그리워한 시간이 길었습니다.
만났던 시간은 짧고
나머지는 기다리며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어느 하늘 어느 땅 아래 다시 만날수 있을는지
떠나간 마음을 그리워 별만 바라봅니다.


 
 
눈물  

마음 둘 데 없어 바라보는 하늘엔
떨어질 듯 깜빡이는 눈물같은 별이 몇 개
자다깨어 보채는 엄마없는 우리 아가
울다 잠든 속눈썹에 젖어있는 별이 몇 개


 
 
다시 오는 봄  

햇빛이 너무 맑아 눈물납니다
살아 있구나 느끼니 눈물납니다
기러기떼 열지어 북으로 가고
길섶에 풀들도 돌아오는데
당신은 가고 그리움만 남아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 있구나 생각하니 눈물납니다

 

 
 
 칸나꽃밭  

가장 화려한 꽃이
가장 처참하게 진다

네 사랑을 보아라
네 사랑의 밀물진 꽃밭에
서서 보아라

절정에 이르렀던 날의 추억이
너를 더 아프게 하리라 칸나꽃밭


 
 
꽃씨를 거두며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슬
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
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다는 일
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 책임
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
께 꽃씨를 거두어 주먹에 쥐며 이제 기나긴 싸움은 다시 시작되
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것이 남아 있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
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


 
 
초겨울  

올해도 갈참나무잎 산비알에 우수수 떨어지고

올해도 꽃진 들에 억새풀 가을 겨울 흔들리고

올해도 살얼음 어는 강가 새들은 가고 없는데

구름 사이에 별이 뜨듯 나는 쓸쓸히 살아 있구나.


 
 
나리꽃  

세월의 어느 물가에 나란히 앉아
나리꽃만 한나절 무심히 바라보았으면 싶습니다

흐르는 물에 머리 감아 바람에 말리고
물소리에 귀를 씻어며 나이가 들었으면 싶습니다

살다보면 어느 날 큰물 지는 날
서로 손을 잡고 견디다가도
목숨의 이파리 끝까지 물은 차올라
물줄기에 쓸려가는 날 있겠지요

삼천 굽이 물줄기 두 발짝도 못 가서 손을 잃고
영영 헤어지기도 하겠지요

그러면 또다시 태어나는 세상의 남은 생애를
세월의 어느 물가에서 따로따로 그리워하며 살겠지요

그리워하다 그리워하다 목이 길어진 나리꽃 한 송이씩 되어
바위 틈에서고 잡풀 속에서고 살아가겠지요.


 
 
 
 
가을 저녁 

기러기 두 마리 날아가는 하늘 아래

들국화는 서리서리 감고 안고 피었는데

사랑은 아직도 우리에게 아픔이구나

바람만 머리채에 붐비는 가을 저녁.


 
 
봉숭아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내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쑥국새 

빗속에서 쑥국새가 운다
한 개의 별이 되어
창 밖을 서성이던
당신의 모습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밤이면
당신의 영혼은
또 어디서 비를 맞고 있는가.


 
우산 

혼자 걷는 길 위에 비가 내린다
구름이 끼인 만큼 비는 내리리라
당신을 향해 젖으며 가는 나의 길을 생각한다
나도 당신을 사랑한 만큼
시를 쓰게 되리라
당신으로 인해 사랑을 얻었고
당신으로 인해 삶을 잃었으나
영원한 사랑만이
우리들의 영원한 삶을
되찾게 할 것이다
혼자 가는 길 위에 비가 내리나
나는 외롭지 않고
다만 젖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먼 거리에 서 있어도
나는 당신을 가리는 우산이고 싶다
언제나 하나의 우산 속에 있고 싶다.

 
 

감 잎 

애비의 마르고 딱딱한 등 위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다 감잎
떨어지는 소리에 딸아이는 잠을 깨고 감잎이 떨어져내리는 동안
의 아주 짧은 이승과 저승 사이.깨어 울며 보채다 깨어 있는 동
안의 의미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바람소리 속에 딸아이는 잠이
들고 올려다보는 하늘과 내려다보는 땅 사이 숨 한번 쉬는 동안
의 이 짧은 이승과 저승 사이


 
 
돌아가는 꽃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 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다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억새풀 


당신이 떠나실 때 내 가슴을 덮었던 저녁 하늘
당신이 떠나신 뒤 내 가슴에 쌓이는 흙 한 삽
떠나간 마음들은 이런 저녁 모두 어디에 깃듭니까
떠도는 넋처럼 가으내 자늑자늑 흔들리는 억새풀


 

 
 
죄를 짓고 돌아온 날 밤 

죄를 짓고 돌아온 날 밤
밤을 새워 울었습니다.
아침마다 당신으로 마음을 열고
날 저물면 당신 생각으로 마음 걸어 닫으며
매일매일 당신 생각만으로 사는데도
이렇게 흔들리며 걸어가는 날이 있습니다.
당신 때문에 울지 않고
무너지는 나의 마음 때문에 울었습니다.
죄를 지은 손 하나를 잘라버리고라도
깨끗한 몸으로 당신께 가고 싶었습니다.
제 몸이 불꽃일 때 물길의 마음으로
언제나 당신이 다독이며 오심으로 제가 살았습니다.
제가 손바닥만큼 당신을 사랑할 때
당신은 한 아름의 크기로 저를 보듬어 주시어
제가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렇게 흔들리는 밤이 많습니까.
죄를 짓고 돌아온 날 밤
당신이 그리워 울지 않고
제 마음이 야속해 울었습니다.


 
 
배꽃 지는 밤 

어제 핀 배꽃이 소리없이 지는 밤입니다
많은 별들 중에 큰 별 하나가 이마 위에 뜹니다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소리없이 울고 있습니다
오늘 같은 밤 가만히 제게 오는 당신의 눈빛 한 줄 만납니다


 
 
서리꽃

서리꽃 하얗게 들을 덮은 아침입니다
누군가의 무덤가에 나뭇짐 한 단 있습니다
삭정이다발 묶어놓고 무덤가에 앉아
늦도록 무슨 생각을 하다 그냥 두고 갔는지
나뭇가지마다 생각처럼 하얗게 서리꽃이 앉았습니다
우리가 묻어둔 뼈가 하나씩 삭아가는 동안에도
우리들은 남아서 가시나무 가지를 치고
삭정이다발 묶으며 삽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우리는 가져갈 수 있는지 모르지만
오늘도 가야 할 몇십 리 길이 있습니다
오늘도 서리꽃 하얗게 길을 덮은 아침들에 나섭니다

 
 
 
 

 

 

 

* 도종환 시인 약력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1> <접시꽃 당신2>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공저) <당신은 누구십니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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