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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정 green time

문정희 시인 시 본문

좋은 시

문정희 시인 시

선한이웃moonsaem 2022. 2. 7. 00:34

 

성공시대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몰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제비를 기다리며 

제비들을 잘 돌보는 것은 우리집 가풍

말하자면 흥부의 영향이지만, 솔직히

제비보다는 박씨, 박씨보다는

박씨에서 쏟아질 금은보화 때문이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가풍을 잘 이어가는 착한 딸

처마 밑에 제비들을 두루 잘 키우고 싶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강남에도

제비들이 좀체 나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서 복권을 사서

주말이면 허공으로 날리기도 하고

참다못해 빈 제비집에 손을 넣었다가

뜻밖에 숨은 뱀에게 물리기도 한답니다

포장마차에서 죽은 제비다리를 구워먹으며

시름을 달래며

솔직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박씨거나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찬 제비!

날렵하게 사모님처럼 허리를 감고

한바퀴 제비와 함께 휘익! 돌고싶은 것은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

 

 

 

나의 장미 

시인은 아름다운가

시간 위에 장미를 피우려고

피를 돌리는 존재

그는 생명인가, 언어인가

그의 감옥에는

홀로 앉아 시를 쓰는 손만 보일 뿐

그는 소경인지도 모른다

시 속에서만 부엉이처럼 눈을 뜨고 사니

현실은 늘 저주

사랑은 언제나 이별

그의 독방에는

그가 풀어놓은 말들이 저희끼리

서로 연애를 하여

결국 까만 알을 낳는다

시는 언어의 딸이 아니라

침묵의 딸인지도 모른다

그는 사랑을 말한 적도 없다

시 쓰다 보면 거기 사랑이 있을 뿐

숨 쉬는 장미 같은.......

 

 

순간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내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처다보면 숨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 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찔래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횐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 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뽀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 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고향을 찾아서  

십수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

민대머리처럼 흙이 벗겨진

아버지 무덤 앞에 섰다.

부끄럽구나

저 널부러진 검불 하나에도

나됩구는 사금파리 하나에도

나는 몸둘 바를 모르겠구나.

내가 때묻은 티티새처럼

이름도 없는 항구로

떠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저 산맥 저 무덤은 비바람에

이마를 적시며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언젠가 돌아올

내 속살을 보고 있었구나.

 

 

 

출세한 시인에게 

너는 생각보다 더 빨리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

물고기처럼 싱싱한 상상력과 지느러미 대신

갈퀴처럼 날카로운 손이라는 도구를 쓸 줄 알았다

너에게 속도와 질주를 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복권에 당첨된 표정 같은 득의만면이 아니라

안개 속에 두려움을 커튼처럼 젖히고 나가

비로소 저 산정에 서서 땀을 씻으라는 것이었다

서서히 네 자신에 도달하라는 것이었다

지난밤의 외로움을 바다 끝까지 밀고나가

심연에 살며

불온한 천재로 자꾸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네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위험한 방식으로

남을 밀어뜨리는 일이었다

관습과 지배의 얼굴을 빠른 속도로 익히고

그 아래 꽃을 바치는 일이었다

시인아, 너는 힘 있는 구두와 빠른 골목을

너무 쉽게 알아버렸다

조금 더 헤매어도 좋았을 것을……

배회와 방황을 속으로 비웃으며

유명한 이름아, 네가 읊조리는 시는

겨우 의미의 시중을 들기 바쁘구나

그래, 매소부(賣笑婦)처럼

예쁘게 부드럽게 손을 흔들어라

이제 물심양면의 하수인들이

책을 사들고 상패를 싸 들고

 

 

 

 

찬밥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1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우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마흔 살의 시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가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 문정희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그때 나는 별을 바라본다.

별은 그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벌레이거나

아무 의도도 없이 나를 가로막는 돌처럼

나의 운명과는 상관도 없지만

별!을 나는 좋아한다.

별이라고 말하며 흔들린다. 아무래도

나는 사물보다 말을 더 좋아하는가보다.

혼자 차를 마시면서도

차를 마시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 싶고

여행보다

여행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정작 연애보다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어쩌면 별도 사막일지 몰라

결국 지상에는 없는 불타는 지점

하지만 나는 별을 좋아한다.

나의 조국은 별같은 말들이 모여서 세운

시의 나라

나를 키운 고향은 책인지도 몰라   

 

 

 

 

남편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물 만드는 여자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려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몸이 큰 여자  

 

저 넓은 보리밭을 갈아엎어

해마다 튼튼한 보리를 기르고

산돼지 같은 남자와 씨름하듯 사랑을 하여

알토란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는

탐스런 여자의 허리 속에 살아 있는 불

저울과 줄자의 눈금이 잴 수 있을까

참기름 비벼 맘껏 입 벌려 상추쌈을 먹는

야성의 핏줄 선명한

뱃가죽 속의 고향 노래를

젖가슴에 뽀얗게 솟아나는 젖샘을

어느 눈금으로 잴 수 있을까

 

몸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지*

식사 때마다 밥알을 세고 양상추의 무게를 달고

그리고 규격 줄자 앞에 한 줄로 줄을 서는

도시 여자들의 몸에는 없는

비옥한 밭이랑의

왕성한 산욕(産慾)과 사랑의 노래가

 

몸을 자신을 태우고 다니는 말로 전락시킨

상인의 술책 속에

짧은 수명의 유행 상품이 된 시대의 미인들이

둔부의 규격과 매끄러운 다리를 채찍질하며

뜻없이 시들어가는 이 거리에

나는 한 마리 산돼지를 방목하고 싶다

몸이 큰 천연 밀림이 되고 싶다  

 

* 미국의 심리분석학자 클라리사 P. 에스테스가 한 말.  

  

 

 조등이 있는 풍경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 갖다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

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몇 십 년만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

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탯줄 

 

대학병원 분만실 의자는 Y자였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새끼 밴 짐승으로

두 다리 벌리고 하늘 향해 누웠다

 

성스러운 순간이라 말하지 말라

하늘이 뒤집히는

날카로운 공포

이빨 사이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인두로 생살 찢기웠다

 

드디어

내 속에서 내가 분리되었다

생명과 생명이 되었다

두 생명 사이에는

지상의 가위로는 자를 수 없는

긴 탯줄이 이어져 있었다

 

가장 처음이자

가장 오래인 땅 위의 끈

이보다 확실하고 질긴 이름을

사람의 일로는 더 만들지 못하리라

 

얼마 후

환속한 성자처럼

피 냄새 나는 분만실을

한 어미와 새끼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남자를 위하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나의 아내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 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잔을 끓여다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 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손의 고백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때보다

그저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오래 흔들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밖은 어둡고 무거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 욕망도 없이 캄캄한 절벽

어느새 초침을 닮아버린 우리들의 발걸음

집중 호우로 퍼붓는 포탄들과

최신식 비극과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매장된 동물처럼

일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어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솨아솨아 흘려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오빠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몫으로 차지한

우리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 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율포의 기도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체온의 시

 

 

빛은  해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대 손을  잡으면

거기  따스한  체온이 있듯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사랑의 빛을  나는  안다.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마음속에  해  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사랑이 있어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밤마다  어김없이  등불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세상을  추운  곳이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세상은  사막처럼  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무거운  바위틈에서도  풀꽃이 피고

얼음장을  뚫고도  맑은 물이  흐르듯

그늘진  거리에  피어나는

사랑의  빛을  보라

 거치른  산등성이를  어루 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보라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는  하늘

해 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빛이  아니면

어두운  밤에

누가  저 등불을  켜는  것이며

세상에  봄을  가져다 주리

 

 

 

 

 

가을 노트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 다한 말

못 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 잎 두 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때

가장 깊은 살 속에

담아 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축복의 노래

 

사랑의 이름으로 반지 만들고
영혼의 향기로 촛불 밝혔네

저 멀리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 하나
둘이 함께 바라보며 걸어가리라

오늘은 새 길을 떠나는 축복의 날
내딛는 발자국마다 햇살이 내리어
그대의 맑은 눈 빛 이슬 매쳤네

둘이서 하나되어 행복의 문을 열면
비바람인들 어이 눈부시지 않으리
추위인들 어이 따스하지 않으리

아아 오늘은 아름다운 약속의 날
사랑의 이름으로 축복하리라

 

 

 

 

겨울 일기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자화상 부근

 

 

"입에 문 파이프에서

진종일 가마귀들이 날아오르는 오후

조요로운 나무 위로

노오란 죽음이 내려앉는

고흐의 방을 두드린다 .

창문처럼 걸려 있는 자화상 속에

삼나무들은 아름다운 고뇌를 울부짖다가

그대로 하나의 정물이 되는데

날 흔들지 마!

날 흔들리지 마!

바늘끝에 서있는 슬픈 눈으로

고흐는 내게 한 잔의 독주를 권하며

먼 이별을 예비시킨다 ."

 

 

 

 

사진 없는 아이

 

 

엄마! 엄마도 죽었으니

이제 그 아이 만났나요?

일곱 살에 죽은 그 아이 돌아올까

한겨울에도 방문 열어 놓고 잔 당신

참척의 비극은

나체로 생담배를 씹어도 불이 타올라

앞가슴 다 열어젖히고

어느 밤엔 밤새 아이 울음 들려 와서

그대로 일어나 묘지로 가서

맨손으로 꽁꽁 언 무덤을 판 여자

무덤 속에서 아이보다 먼저

함께 묻은 작은 신발 손끝에 닿아

그 자리에 실신한 후

이듬해 봄 당신의 몸에 기적처럼 생겨난

새 아이가 지금 이런 시를 쓰네요

이 아이도 떠날까 봐

사진 한장 찍어 두지 않아

사진 없는 아이

죽은 아이에게 엄마를 돌려주고

시를 쓰네요

먼저 죽은 누이 마리아의 이름을 붙여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된 시인을 떠올리며

죽은 아이 겹치어 새겨진

내 유년의 슬픔을

한 편의 시로 써서 엄마에게 바치네요

 

 

 

 

 

 

문정희 시인 약력

 

전남 보성에서 출생, 1969년 《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나는 문이다』, 『카르마의 바다』,『응』,『작가의사랑』 등과 시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 외 에세이집 등이 다수 있다,

미국 뉴욕에서 출판된 영역시집을 비롯 9개국 언어로 번역된 번역시집 13권이 있음.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목월문학상, 청마시문학상, 스웨덴 2010년 시카다상(cikada Literary Prize of Sweden) 등 수상. 고려대 교수, 한국 시인협회 회장 역임.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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