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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정 green time
나태주 시인 시 본문
나태주 / 풀꽃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풀꽃.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나태주/ 풀꽃3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11월 / 나태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겠습니다.
돌멩이 / 나태주
흐르는 맑은 물결 속에 잠겨
보일 듯 말 듯 일렁이는
얼룩무늬 돌멩이 하나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야지
집어 올려 바위 위에
놓아두고 잠시
다른 볼일보고 돌아와
찾으려니 도무지
어느 자리에 두었는지
찾을 수 없다
혹시 그 돌멩이, 나 아니었을까.
사랑 / 나태주
목말라 물을 좀 마셨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유리컵에 맑은 물 가득 담아
잘랑잘랑 내 앞으로 가지고 오는
창밖의 머언 풍경에 눈길을 주며
그리움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있을 떼
그 물결의 흐름을 느끼고 눈을
글썽글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아주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한마디 말씀도 이루지 아니했고
한 줌의 눈짓조차 건네지 않았음에도
.
쑥부쟁이 / 나태주
개울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오시오
외다리 짚고 서서
고기 찍고 있는 해오라기
두어 마리 만날 수 있을 거요
더 위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오시오
고삐에 매여서도
마른 풀잎 씹고 있는
누렁소 한 마리
검정 염소 또 몇 마리
만날 수 있을 거요
물소리 높아졌다가
자지라 지는 곳쯤에서
나를 찾으시오
서리 내린 뒤에도
하늘 향해 웃고 있는
연보랏빛 쑥부쟁이
몇 송이, 그게 나요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씀 있거든
그 쑥부쟁이한테
놓고 가시구려
쑥부쟁이 바람에
고개를 흔들거든
당신의 말씀
알아들은 줄
아시고요.
들국화 / 나태주
객기 죄다 제하고
고향 등성이에 와
비로소 고른 숨 골라 쉬며
심심하면
초가집 이엉 위에 드러누워 빨가벗은
박덩이의 배꼽이나 들여다보며
웅얼대는 창자 속 핏덩일랑
아예 말간 이슬로 쓸어버리고
그렇지!
시장끼 하나로
시장끼 하나로
귀 떨어진 물소리나
마음 앓아 들으며
돌아앉아 후미진 산모롱이쯤
내가 우러러도 좋은
이 작은 하늘, 이 작은 하늘아.
들국화 2 / 나태주
1
울지 않는다면서 먼저
눈썹이 젖어
말로는 잊겠다면서 다시
생각이 나서
어찌하여 우리는
헤어지고 생각나는 사람들입니까?
말로는 잊어버리고 마고
잊어버리고 마고.....
등이
아래서.
2
살다 보면 눈물 날 일도
많고 많지만
밤마다 호롱불 밝혀
네 강심에 노를 젓는
나는 나룻배.
아침이면
이슬길 풀숲 길 돌고 돌아
후미진 곳
너 보고픈 마음에
하얀 꽃송이 하날 피웠나 보다.
석류꽃 / 나태주
이 꽃은
예로부터 고요하고 아름다운 동방의 나라
아침 이슬 냄새가 묻어나는 꽃.
이 꽃은
이 땅에 대대로 생겨나서
발뒤꿈치가 달걀처럼 이쁜 새댁들의
웃음소리가 들어 있는 꽃.
허물어진 돌 덤불 가에 장독대 옆에
하늘나라의 촛불인 양 피어 선연히
그 며느리들을 대대로 내려가며
투기하는 이 땅의 시어머니들의
한숨 소리도 들어 있는 꽃.
앞으로도 이 땅에서
끊이지 않고 생겨나서
발뒤꿈치가 달걀처럼 이쁠 새댁들의
웃음소리가 연이어 들어 있을 꽃.
연이어 들어 있을 꽃.
족두리꽃 / 나태주
왕관 초라 부르기보다는
족두리꽃이라 불러야
더욱 족두리 꽃다워지는
족두리꽃
씨 뿌린 사람 없이
올해도 두 그루 실하게
싹이 터서
소낙비 속에 새
치마저고리 갈아입고
족두리 하나씩 받쳐 쓰고
사립도 없는 오두막집
지켜 서 있네
미장이 막일꾼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젊은 내외
검은 눈 별빛 초롱초롱
아들 형제
낳아 기르며 사는
오두막집
개구리울음소리 곁에
물소리 또 그 곁에.
수선화 / 나태주
언 땅의 꽃밭을 파다가 문득
수선화 뿌리를 보고 놀란다.
어찌 수선화, 너희에게는 언 땅 속이
고대광실高臺廣室 등 뜨신 안방이었더라 말이냐!
하얗게 살아 서릿발이 엉켜 있는 실뿌리며
붓끝으로 뾰족이 내민 예쁜 촉.
봄을 우리가 만드는 줄 알았더니
역시 우리의 봄은 너희가 만드는 봄이었구나.
우리의 봄은 너희에게서 빌려온 봄이었구나.
붓꽃 / 나태주
슬픔의 길은
명주실 가닥처럼이나
가늘고 길다
때로 산을 넘고
강을 따라가지만
슬픔의 손은
유리잔처럼이나
차고도 맑다
자주 풀숲에서 서성이고
강물 속으로 몸을 풀지만
슬픔에 손목 잡혀 멀리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온 그대
오늘은 문득 하늘
쪽빛 입술 붓꽃 되어
떨고 있음을 본다.
산 난초 /나태주
누군가 지난가을
산에서 캐다가 아무렇게나
질그릇 화분에 심어 놓은
산 난초
겨우내 돌보지 않고
뜨락 구석지 내박쳐 뒀는데
봄 오자 꽃대를 내밀었다
그것도 세 놈이나 나란히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왕 죽을 거라면
꽃이나 한 번 피워보자고
죽자 사자 꽃이나 한 번
기차게 피워보자고
봄이 와 죽자 사자 책가방 메고
학교로 가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는 아이들
퇴출될까 눈치 보며
죽지 못해 감봉을 감수하고
일터에 빌붙어 사는 어른들
봄이 오자 그늘진 뜨락에
버려둔 산 난초꽃
세 송이나 꽃을 벌었다.
씀바귀꽃 / 나태주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대전 발 대구행 새마을 열차
빠르게 달리는 철로 변에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서
잔잔하게 웃음 머금고 있는
노랑꽃
당신같이 마음속 등불이
꺼져버린 사람과는 눈빛조차
맞추기 싫어요
개구리자리 애기똥풀꽃보다는 키가 낮고
민들레보다는 꽃 판이 훨씬
작은 꽃
15년 전이던가 만났던 내 시의 독자
세실리아란 소녀가 수녀가 되어
종신 서원식을 갖는다기
대구 성심수녀원을 찾아가는 길에
만난 꽃
좀처럼 본명 일으켜주려 하지 않았다.
민들레 / 나태주
우주의 한 모서리
스님들 비우고 떠나간 암자
늙은 무당이 흘러, 흘러 들어와
궁둥이 붙이고 사는 조그만 암자
지네 발 달린 햇빛들
모이는 마당가 장독대
깨어진 사금파리 비집고
민들레는 또 한 번의 생애를
서둘러 완성하고
바람결에 울음을 멀리
멀리까지 날려 보내고 있었다
따스한 봄날의 하루.
나팔꽃 / 나태주
여름날 아침, 눈부신 햇살 속에 피어나는 나팔꽃 속에는 젊으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얘야, 집안이 가난해서 그런 걸 어쩐다냐. 너도 나팔꽃을 좀 생각해보거라. 주둥이가 넓고 시원스러운 나팔꽃도 좁고 답답한 꽃 모가지가 그 밑에서 받쳐주고 있지 않더냐. 나는 나팔꽃 꽃 모가지밖에 될 수 없으니, 너는 꽃의 몸통쯤 되고 너의 자식들이나 꽃의 주둥이로 키워보려무나. 안돼요, 아버지. 안 된단 말이에요. 왜 내가 나팔꽃 주둥이가 되어야지, 나팔꽃 몸통이 되느냔 말이에요!
여름날 아침, 해맑은 이슬 속에 피어나는 나팔꽃 속에는 아직도 대학에 보내달라 투덜대며 대어 드는 어린 아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는 젊으신 아버지의 애끓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난초 / 나태주
알려 주지 않고
귀띔해 주지 않아도
난초는
어디로 이파리를 뻗어야 하고
어떻게 꽃을 피워야 좋은지를
안다
아무렇게나 이파리를 뻗어도
멋스럽고
아무렇게나 꽃을 피워도
어여쁜 난초
그는 이제 스스로
법이요 길이다.
분꽃 / 나태주
개울가에 외딴집
분꽃들이 피었다
하양 빨강 어쩌다 노랑
혼자 사는 아낙네
빨래 걷는 저녁때
아직은 가슴속에
입 벌린 소망과 슬픔
보고 가라 이른다.
패랭이꽃 / 나태주
밖으로 타오르기 보담은 안으로
끓어오르기를 꿈꾸고 열망했지만
번번이 핏물이 번진 손수건, 패랭이꽃 빛
치사한 게 정이란다 눈 감은 게 마음이란다.
메밀꽃이 폈더라 / 나태주
메밀꽃이 폈드라
새하얗더라
여름내 흰구름이
엉덩이 까 내리고
뒷물하던 자리
바람의 칼날에 몰려
벼랑 끝에 메밀꽃이
울고 있더라
끝끝내 아무도 없더라
메밀꽃은 대낮에도
달밤 이드라.
단풍 / 나태주
숲 속이 다, 환해졌다
죽어 가는 목숨들이
밝혀놓은 등불
멀어지는 소리들의 뒤통수
내 마음도 많이, 성글어졌다
빛이여 들어와
조금만 놀다 가시라
바람이여 잠시 살랑살랑
머물다 가시라.
봄 / 나태주
딸기밭 비닐하우스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 들린다
응애응애 응애
애기는 보이지 않고
새빨갛게 익은 딸기들만
따스한 햇볕에
배꼽을 내놓고 놀고 있다
응애응애 응애
아기 울음소리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숲 / 나태주
비 개인 아침 숲에 들면
가슴을 후벼내는
비의 살내음.
숲의 살내음.
천 갈래 만 갈래 산새들은 비단 색실을 푸오.
햇빛보다 더 밝고 정겨운 그늘에
시냇물은 찌글찌글 벌레들인 양 소색이오
비 개인 아침 숲에 들면
아, 눈물 비린내. 눈물 비린내.
나를 찾아오다가 어디만큼 너는
다리 아파 주저앉아 울고 있는가.
별처럼 꽃처럼 - 나태주
별처럼 꽃처럼 하늘에 달과 해처럼
아아, 바람에 흔들리는 조그만 나뭇잎처럼
곱게곱게 숨을 쉬며 고운 세상 살다가리니,
나는 너의 바람막이 팔을 벌려 예 섰으마.
앉은뱅이꽃 - 나태주
발밑에 가여운 것
밟지 마라
그 꽃 밟으면 귀양 간단다
그 꽃 밟으면 죄받는단다.
나태주 시인 약력
1945년 충남 서천군 시초면 초현리 111번지(그의 외가)에서 출생.
시초국민학교, 서천중학교 졸업
1963년 공주사범학교 졸업, 이후 한국방송통신대학과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64년 경기도 연천군 군남국민학교 교사로 발령
이후 여러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청양 문성국민학교 교감,
충남교육연수원 장학사, 공주 왕흥초등학교 등 교장으로 정년퇴임,
황조근정훈장 받음.
1966∼1969년 3년 6개월 동안 육군(주월 비둘기부대) 사병으로 복무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심사, 박목월 박남수 선생).
1973년 첫 시집 ≪대숲 아래서≫ 출간.
이후 ≪누님의 가을≫, ≪막동리 소묘≫, ≪풀잎 속 작은 길≫, ≪슬픔에 손목 잡혀≫,
≪산촌 엽서≫, ≪쪼끔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이 세상 모든 사랑≫, ≪물고기와 만나다≫,
≪꽃이 되어 새가 되어≫, ≪눈부신 속살≫, ≪시인들 나라≫ 등 30권 출간.
1981년 산문집 ≪대숲에 어리는 별빛≫ 출간.
이후 ≪절망, 그 검은 꽃송이≫, ≪외할머니랑 소쩍새랑≫, ≪추억이 말하게 하라≫, ≪쓸쓸한 서정
시인≫, ≪시골 사람 시골 선생님≫, ≪아내와 여자≫, ≪꽃을 던지다≫, ≪공주,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 ≪돌아갈 수 없기에 그리운 보랏빛≫, ≪풀꽃과 놀다≫ 등 여러 권 출간.
1988년 선시집 ≪빈손의 노래≫ 출간.
이후 ≪추억의 묶음≫, ≪손바닥에 쓴 서정시≫, ≪네 생각 하나로 날이 저문다≫,
≪지상에서의 며칠≫, ≪비단강을 건너다≫(사진시집) 등 출간.
1999년 시화집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출간, 이후 ≪너도 그렇다≫ 출간.
2001년 이성선, 송수권 시인과의 3인 시집 ≪별 아래 잠든 시인≫ 출간.
2004년 동화집 ≪외톨이≫ 출간.
2006년 ≪나태주 시전집≫(고요아침, 전 4권) 출간.
< 수상 >
흙의문학상(1979. 12),
충청남도문화상(1988. 11),
현대불교문학상(1997. 4),
박용래문학상(2000. 12),
시와시학상(2002. 12),
편운문학상(2003. 5),
한국시인협회상(2009. 3)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