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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정 green time

마경덕 시인의 시 본문

좋은 시

마경덕 시인의 시

선한이웃moonsaem 2021. 9. 8. 13:55

저녁과 밤 사이

 

해 질 무렵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햇살에 등을 태우던 나무들이 남은 온기를 속주머니에 찔러넣고 있었다

언젠가 어둠속에서 바라본 강 건너 불빛 서너 개 정도의 온기였다

어린 새 들이 둥지에 드는 동안

맨발로 이곳까지 걸어 온 저녁은 신발을 고르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저녁의 신발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헐렁한 신발을 신고

저녁이 허리를 펴는 순간,

일제히 팔을 벌리는 나무들, 참나무 품에 산비둘기가 안기고

떡갈나무 우둠지에 까치가 자리를 잡았다

잘 접힌 새들이 책갈피처럼 꽃히고

드디어 저녁이 완성되었다

해가 뚝 떨어지고 숲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순신간에 저녁이 시야가 어두워졌다

저녁과 밤이 이어지는 그 사이를 서성거리며

난생처음 어둠의 몸을 만져도았다

자꾸 발을 거는 어둠에게 수화로 마음을 건네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더듬더듬 길을 찾는 동안, 자정의 밤은 산꼭대기 까지 차 올랐다

뻘밭에 빠저 달려드는 바다를 바라보던 망연한 그때처럼

일시에 몰려든 어둠으로 숲은 만조였다

썰물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어제와 오늘을 이어 붙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나무들도 한줌 체온을 껴안고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외출이 신발을 싣은 것으로 완성되었다

신발끈을 조이며 어둠이 빠지기를기다렸다

몇번이나 나를 들여야 보고 지나갔다

어둠의 이마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놀란 흙

 

뒤집힐 때 흙도 놀란다

쟁기 삽 괭이 호미 쇠스랑 포클레인 누가 제일 먼저 괭잇날에 묻은 비명을 보았을까

낯빛이 창백한, 눈이 휘둥그런

 

 

겨냥한 곳은 흙의 정수리거나 잠든 미간이거나,

 

 

흙의 표정을 발견한 누군가의 첫 생각, 그때 국어사전에 놀란흙이라는 명사가 버젓이 올라갔다

 

흙의 살붙이, 지렁이 땅강아지 개미 두더지

그것들이 가랑이를 헤집어 집을 짓고 길을 내도 놀라지 않는다

나무뿌리, 바위뿌리에도 덤덤한 흙이

사람만 보면 왜 그리 놀라는지,

 

 

흙의 나라

태초에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을 닮은 흙의 심장은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공사장 주변, 포클레인이 파헤친 땅

매장된 산업폐기물을 껴안고 까맣게 죽어있었다

싱싱하던 흙빛은 흑빛이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아버지는 흙집으로 들어가

더는 놀라지 않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래서 자주 놀란다

 

 

 객짓밥

 

하나님은

저 소금쟁이 한 마리를 물 위에 띄우려고

다리에 촘촘히 털을 붙이고 기름칠을 하고

수면에 표면장력을 만들고

 

 

소금쟁이를 먹이려고

죽은 곤충을 연못에 던져주고

물위에서 넘어지지 말라고 쩍 벌어진 다리를

네 개나 달아주셨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연못이 마르면

다른 데 가서 살라고 날개까지 주셨다

 

우리 엄마도

서울 가서 밥 굶지 말고, 힘들면 편지하라고

취직이 안 되면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지 말고

그냥 집으로 내려오라고

기차표 한 장 살 돈을 내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 한마디에

객짓밥에 넘어져도 나는 벌떡 일어섰다

 

 

내게 맡겨둔 당신은

아직 무사해요

조금은 슬픈 일이지만,

벌레도 갉아먹지 못한 쓸쓸함 몇 장,

아직 초록이에요

 

 

T자 꼭지

당도糖度를 보장하는 T

이쪽저쪽 길을 끊고

수박밭을 통째로 걷어냈다

절정의 때, 확신에 찬 손길로 농사를 마감한

T자 수박 한 통을 사는 것은

수박의 남은 생애까지 다 사는 것이다

어느 농부의 단호한 결심일까

자리를 털고 일어선 무거운 엉덩이들

한 번의 가위질에 물길이 오가던 수로水路는 사라지고

목이 타들어가도

가득 채운 단물은 제 것이 아니었다

넝쿨을 버리고 길바닥에 나앉은 천애 고아들,

잘린 배꼽 땡볕에 말라간다

 

 

뒤끝

버스 뒷좌석에 앉았더니 내내 덜컹거렸다
버스는 뒷자리에 속마음을 숨겨두었다
그가 속내를 꺼냈을 때도 나는 덜컹거렸다
뒤와 끝은 같은 말이었다

천변川邊이 휘청거렸다
나무의 변심變心을 보고 있었다
이별을 작심한 그날부터 꽃은 늙어
북쪽 하늘이 덜컹거렸다
코 푼 휴지를 내던지듯 목련은 꽃을 던져버리고
남쪽을 향해 돌아앉았다

발밑에 널린 파지를 밟으며 걸었다
자줏빛 눈물이 신발에 묻어왔다

길가 벚나무가 검은 버찌를 버릴 때도
보도블록은 잉크빛이었다
뒤가 어두울수록 앞은 환하고 눈이 부셨다

뒤끝이 지저분한 계절이었다

 

 

 

칡꽃

 

 

칡꽃이 피기 시작하면

뒷산 뻐꾸기가 숨은 어미처럼 구슬펐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돌무덤이 칭얼거리면
산그늘이 빈 젖을 물리고 갔다
젖이 흐르던 어미는 어디로 갔을까
뒷산은 멀리 날아 가버린 애기들을 무거운 돌멩이로 눌러놓았다

칡뿌리처럼 질긴 아이들도 그곳을 지날 때면 청포묵처럼 말랑해졌다
금지구역,
넓적바위 곁에는 눈썹 없는 여자보다 더 무서운 적막이 살고 있었다

칡덩굴은 왜 돌무덤을 향해 기어갔을까
산비둘기 울음이 자욱하게 내려앉으면 소문은 머리를 풀고
마을까지 내려왔다//
가지마라 가지마
할미의 잔소리가 뒷덜미를 당겨도, 아이들은
손아귀에서 파들거리던 어린 새처럼 파헤쳐진 무덤을 들여다보았다
텅 빈 항아리

팽팽한 고요를 품고 늙어가던 무덤들,

산중턱에 널린 주인 없는 무덤은 바람에 흘러내리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보리밭처럼 살이 올랐다

칡꽃이 붉은 혀를 꺼낼 때쯤

죽은 애기들도 다시 혀가 돋았다

 

 

 

어처구니

 

 

나무와 돌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

 

근본이 다르고
핏줄도 다른데 눈 맞추고
살을 섞는다는 것
아무래도 어처구니없는 일

 

한곳에 붙어살며 귀가 트였는지,

 

벽창호 같은 맷돌
어처구니 따라
동그라미를 그리며 순하게 돌아간다

 

한 줌 저 나무
고집 센 맷돌을 한 손으로 부리다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

 

 

 

 신발론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물의 입

 

돌멩이를 던지는 순간

둥근 입 하나 떠올랐다

파문으로 드러난 물의 입,

잔잔한 호수에 무엇이든 통째로 삼키는 거대한 식도食道가 있다

물밑에 숨은 캄캄한 물의 위장

찰나에 수면이 닫히고

가라앉은 것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물가에서 몸부림치던 울음을 지우고 태연한 호수

계곡이며 개울을 핥으며 달리다가

폭포에서 찢어진 입술을 흔적 없이 봉합하고

물은 이곳에서 표정을 완성했다

물속에 감춰진 투명한 찰과상들, 알고 보면 물은 근육질이다

무조건 주변을 끌어안는

물의 체질

​그 이중성으로 부들과 갈대가 번식하고 몇 사람은 사라졌다

 

물의 얼굴이 햇살에 반짝인다

​가끔 허우적거림으로 깊이를 일러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잔잔한 물의 표정을 믿고 있다

 

 

 

모래 척추

 

평생 누워있는 사막

바람이 불 때마다 와르르 척추가 흘러내린다

 

모래척추는 사막의 고질병,

 

수렁과 유사(流砂)는 살아있는 뼈를 삼켰지만

사막의 등뼈는 자라지 않았다

 

척추가 무른 아비 어미도

그렇게 평생을 뒹굴며 늙어가고

흙바람이 불 때마다 낙타의 무릎만 단단해졌다

 

만년설에 목을 축이고

미라가 된 천년 묵은 호양나무 지팡이를 짚고

몇 걸음이나 걸었나

 

물결처럼 건너간 바람의 발자국을 신어 보아도

모래의 유전자는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저 모래척추를 무엇으로 부축할까

 

무릇, 등뼈는 수직이어야 한다

수평이 되면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

 

회오리를 붙들고 돌아눕는 사막

욕창 난 등이라도 말려야 한다

 

 

 

갈꽃비

 

바닥에 쓸리는 마른 갈꽃들,

부드러운 허공을 쓰다듬으며 스치는 바람이나 붙잡고 살려했더니

꿈은 가장 먼 곳에 있었다

평생 얼굴을 비비며 살아갈 곳은 딱딱한 바닥이었다

 

어느 촌로의 손에 뽑히는 순간, 수숫대가 모가지를 버리듯

불길한 예감에 떨었을 갈대의 꽃

박제된 시간들이 오색 끈으로 단단히 묶였다  

마당 귀퉁이에서 수수비가 늙어가듯  

마루와 방문턱을 넘나들며 시나브로 제 목숨을 허물었다

 

입술 다문 꽃술이 바스러질까

묽은 소금물에 끓고

그늘에 피를 말린 저 꽃을 낙화라고 불러볼까

꽃 때를 기다린 갈대밭이

서둘러 꽃을 버린 것은 오래전의 일,

습지에 바람이 다녀가는 것도 생의 각질을 털어내는 일이었다

 

허공을 쓸던 버릇으로

머리부터 사라지는 갈꽃비,

그에게 바닥이란 하늘과 같은 말이다

벽에 거꾸로 걸린 그의 생업은 머리로 걷는 물구나무 걸음이었다

 

누가 꽃으로 티끌을 모으려했던가

끝내 몽당비가 되어 벽에 풀칠이나 하다 버려질 저 꽃비

쓸고 닦는 생의 목록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뒤꼍

 

허공이 빽빽하다. 늙은 호두나무는 한 해 지은 농사를 전시중이다. 품

꾼처럼 끝물 농사를 거들던 햇살이 매미울음에 구멍 난 그늘을 다 기웠

다. 나무는 흔들리는 새소리와 그늘은 가지에 걸 수 없어 목록에서 빼

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나는 직박구리 한 쌍과 멍석만한 그늘을

거저 받았다.

 

 그동안 나무의 농사는 지붕위에서 벌어졌다. 나무는 약을 치듯 이파

리마다 기름진 볕을 발라주었다. 지난봄, 바람의 고삐를 끌며 빛을 심

는 것을 보았다. 그때 봄의 눈부신 쟁깃날에 지붕이 출렁거리고 우묵우

묵 허공에 골이 파였다. 직박구리 부부가 울음으로 북을 돋우고 있었다.

 

 우듬지에서 실족한 호두 한 알이 고요의 속살을 찔렀지만 고요는 곧

아물었다. 마당에 깔린 지붕만한 정적은 내 것이고 지붕만한 하늘은 호

두나무 밭이다. 이삭 줍듯 그늘을 주워 깔고 앉으니 습하고 서늘하다.

나무농부가 사는 뒤꼍, 새참처럼 짧은 볕이 다녀간다.

 

 

꽃병

 

 

온 몸이 입이다

 

한입에 욱여넣은 붉은 목 한 다발 부르르 꽃잎이 떨린다

잘린 발목에서 쏟아지는 비린 수액 입안 그득 핏물이 고인다

소리 없이 생피를 들이켜는 저 집요함

허기진 구멍으로 한 아름 허무를 받아먹는,

 

식욕과 배설뿐인 캄캄한 구멍은 입이고 항문이다

 

시한부 목숨들

물컹물컹 썩어 가는 발목을 담그고 일제히 폭소를 터뜨린다

 

 

 

선글라스 효과

 

 

두 개의 눈은 선팅 되고

오자 탈자가 많은 과거는 그럴듯하게 교정되었다

 

탈선을 꿈꾸며 바퀴는 레일에 묶여 늙어가고

이 평온한 음모는 분노로 바뀔 수 있다

몇 푼, 또는 공짜로

앉아서 질주하는 가지런한 질서들

불온한 상상은 미동도 없이 맞은편 일곱 명의 목을 조일 수 있다

 

무표정으로 가장한

수시로 치미는 불끈,

 

불법은 나를 겨냥하고

어미는 어둠의 씨를 조립했다 얼굴없는 아비는

뒤로 넘어져 코가 깨지도록 나를 설계했다

 

얼굴에서 눈만 떼어내면

타인의 이름으로 불행을 위조할 수 있고

완벽한 알리바이도 가능하다

 

눈은 그대로 두고 입으로 웃는다

 

선글라스 뒤에 숨어

인간을 포기할 수도 있다

 

 

계란 프라이

 

스스로 껍질을 깨뜨리면 병아리고

누군가 껍질을 깨주면 프라이야,

남자의 말에 나는 삐약삐약 웃었다.

나는 철딱서니 없는 병아리였다. 
 
그 햇병아리를 녀석이 걷어찼다.

그때 걷어차인 자리가 아파  가끔 잠을 설친다. 

자다 깨어 날계란으로 멍든 자리를 문지른다. 

어쩌면 녀석의 발길질에

내 껍질이 깨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프라이가 된 셈이다.

분명 팬에 놓인 것처럼 심장이 뜨거웠고

소금 뿌린 자리가 쓰라렸다.

그와 헤어진 후 또 한 개의 흉터를 얻었다.

자라목에 두꺼운 안경을 낀 말대가리 같은 녀석,

맞선에서 몇 번이나 차였는지 상처투성이였다.

그래 어디를 걷어 차줄까, 잠깐 방심하는 사이,

눈치 빠른 녀석이 먼저 박차고 일어섰다.

얼떨결에 나는 쩍 금이 갔다.

 

헛발질에도 쉽게 깨지던,

계란으로 바위 치던 시절,

사랑은 내게 넘치거나 못 미쳤다.

번번이 달궈진 팬에 왈칵 쏟아졌다.

나는 한 번도 껍질을 깨지 못했다 

 

 

환지통

 

잘린 나무는 어떻게 긴 밤을 견디는 것일까

없는 가지가 사무쳐 온몸으로 벅벅 허공을 긁는다는 말, 허공이 욱신거려

손목이 돋는 봄을 기다린다는 말

이것은 손톱에 때가 낀 나무들만 아는 이야기가 아니다

 

피가 나게 허공을 긁어본

보기 좋은 나무들은 손목이 없다

 

그들이 제일 먼저 떠올린 건 마취제일까 진통제일까

 

교통사고를 당한 사내도 다리가 아파 못살겠다고

없는 다리를 만지며 엉엉 운다

 

의사가 말했다

사라진 다리를 기억하는 것은 뇌라고

걷고 달리고 걷어차던 습관을 뇌는 아직 붙잡고 있는 거라고

 

오래전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홀아비도

없는 자식이 그토록 아프다고 한다

 

살아있는 것처럼,

없는 다리가 아프고

없는 자식이 또 아프다

 

치장을 마친 정원의 나무들이 동쪽 허공을 문지르며 우는 밤이다

 

 

 

 

 

바나나 속이기

 

 

케이지에 불을 켜두면 닭들은 밤중에도 알을 낳는다

그렇다면 이번엔 또 누구를 속여 볼까

사람들은 머리를 쥐어짜지

나무 등에 업힌 설익은 송이들

미처 이별을 알기도 전, 바닥에 닿으면 노랗게 기절해버리지

이미 품을 떠나 거뭇거뭇 불안한 반점이 돋지

장사꾼은 더 맛있다며

검은 반점을 내밀기도 해

껍질을 까는 순간 드러날 농익은 거짓말을

지나치게 단 것은 의심해도 좋아

부패는 그렇게 시작되거든

바나나의 체질을 눈치 챈 사람들

나무나 철사로 걸개를 만들고 그곳에 걸어두지

사람에게 속은 줄도 모르고

바나나는 천천히 시들어가지

죽은 나뭇가지를 붙잡고

 

 

볶은 콩

 

 

날콩을 볶는다

비린 피가 고소해지도록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콩, 뜨거운 냄비를 주걱으로 휘저어도

아직 비리다

타닥타닥 튀어오른다

콩의 말을 한 번도 배운 적 없어

참 다행이다

내가 아는 말은

도르르, 콩콩, 데굴데굴, 겨우 그 정도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흩어지지 않게 자루에 넣거나 봉지에 담는 정도

둘러앉아 콩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

콩 한 줌에 벌어지는 입들

고소한 피 냄새가 거실까지 날아간다

콩대는 콩잎을, 콩잎은 꽃을 피워

방방마다 콩을 낳고

꼬투리 꼭 닫아건

콩, 오늘 내 손에 죽었다

콩의 말을 알지 못해 참 다행이다

 

 

 

조화의 서식지

 

좌판에 나앉은 입술 붉은 꽃들, 짙은 속눈썹, 볕에 드러난 주근깨

티 나게 솔직하다

 

변두리 다방 김양을 닮은 한물간 이 유행을 누가 사갈까

 

이 꽃도 먹히는 곳이 있다 울긋불긋 무더기무더기 웃음이 핀 국립묘지, 누군가 꽂아둔 안부 한 줌 싱싱하다

 

묘지에 터를 잡은 조화造花들 까르르 호호호 슬퍼할 틈도 없이 콧소리 간드러진다 오빠 왜 그리 빨리 시들었어요 우리처럼 오래 살지 그랬어요

 

모처럼 묘지에 생기가 돈다 백골白骨의 사내들이 벌떡벌떡 일어선다

 

몸에 철심을 박고도 살 수만 있다면…

 

노숙을 하며 고인의 곁을 지키는 화사한 꽃들, 물 한 방울 없이 버티는 뼈가 철심이다

 

이곳에는 철없는 조화가 딱이다

죽은 자의 마음은 죽은 꽃이 먼저 안다

 

 

 

딸기의 사생활

 

맨발로 기어간다

척추가 없는 생, 마디마디 헛뿌리를 내민다

흙밭을 뒹구는

노숙의 힘으로 딸기밭은 번성한다

 

입덧의 계절,

헛구역질하는 봄이 달콤해진다

게워낸 붉은 물에 잎자루가 무겁다

비닐하우스로 이전해 사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그녀들

벌통 하나가 딸기밭을 다스린다

집단 사육당한 사랑들,

철없이 무더기로 태어나도 호적에도 못 오르는

벌의 혼외자식들

 

땅과 하늘의 궁합, 날개가 뒤섞여도

여전히 바닥이 우성優性이다

 

어차피 노골적인 그녀들

살구 자두 복숭아처럼 굳이 씨를 감추지 않는다

 

 

맨몸에

깨알 같은 씨를 촘촘히 박는 전략으로

딸기의 사생활은 이어진다

 

 

 

물컹한 돌

 

저 단단한 돌은

죽은 물고기 떼, 빙하를 따라 흘러온 암석의 파편

깨진 물거품, 바람과 파도의 부스러기

쌓이고 쌓인 부드러운 퇴적물을 공룡이 밟고 지나갈 때

물컹, 물컹, 육중한 체중이 찍혔을 것이다

 

뻘을 밟는 느낌이었을까

중생대 백악기의 발바닥에서 비릿한 냄새가 난다

 

짠물에 침식된 아득한 시간, 물컹한 것은 제 가슴에 발자국 본을 뜨고 있었다고

해안에 둑을 쌓고 뭍으로 올라와 증언한다

 

공룡을 버리고 뼈도 버리고

발자국만 품은 저 화석

그때 발을 빠뜨린 공룡은 발목을 들고 어디로 사라졌을까

 

깊은 어둠이 되거나 파도의 발길질에 사라질 하찮은 것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을 줄 공룡은 짐작이나 했을까

 

익룡까지 키운 까마득한 힘으로

숨을 쉬는 돌

 

누가 역사인가

거대한 것들은 지구에서 사라지고 밟히는 것들만 살아남았다

 

 

저 물컹한 것이 증인이다

 

 

 

초록홍합

 

홍합에게도 입술이 있구나

껍데기에 초록 테두리를 두른 곳까지 둥근 입이다

 

얼굴의 절반을 차지한 커다란 입술은

뉴질랜드 초록 바다를 보호색이라고 믿었을까

투명한 초록 물빛에 숨지 못해

그곳을 떠나왔을 것이다

 

붉은 입을 가졌다면

혹은, 검은 입을 가졌다면

누가 네 입을 맞추려 했을까

 

매끼 밥상에 오른 초록입으로

해안가 마오리족은 어느 부족보다 관절이 튼튼했는데

 

너는 살기 위해 플랑크톤을 잡아먹고

뼈가 무른 사람은 너를 잡아먹는다

 

 

어느 시인은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을 사슴이라고 했는데

나는 네 입이 초록이어서 다행이라고 쓴다

 

초록검색창에

초록입이 뜬다

 

네 입술과 내 입을 맞추면

너는 내 관절과 입을 맞추리라

 

차마, 예의가 아니지만

부실한 두 무릎을 초록입술에게 내민다

 

 

 

총알택시

 

총을 쏴 본 적은 없지만

총알의 속도는 알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수원에서 서울로 날아오던 총알택시

 

포장마차에서 노래방으로 가라오케로

2차, 3차 흥을 장전한 남편

방아쇠를 움켜쥔 퇴근은

취기가 묻은 춤과 노래로 사정거리를 벗어나고

 

자정을 넘기고 부랴부랴 집을 향해 날아올 때

미끄러운 빗길에 조준이 빗나갈까

곤히 주무시는 하나님을 몇 번이나 흔들어 깨웠다

 

총알보다 빠른 총알택시

네 개의 바퀴는 과열된 총구처럼 달아오르고

밤늦은 귀가가 무사히 과녁에 명중할 때마다

낯선 택시에게 꾸벅 절을 했다

 

그 시퍼렇던 객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아내의 가슴에 탄흔은 남았는데

이제 어디에도 탄피 하나 없다

 

어느새 총알을 다 써버리고

 

 

 

 

보온병

 

24시간 품었던 온수

입술을 데던 열정은 어디로 갔을까

물샐틈없이 닫아 둔 온기는 어디론가 빠져나가

미지근하다

 

병에 갇혀 질식한 물맛은 이런 것인가

 

커피를 저어도 커피는 살아나지 않는다

와락, 물의 품에 안기고 싶은

믹스커피들

민감하게 반응한다

갈색의 입자가 스푼에 달라붙는다

 

완전한 분해,

황금비율로 제조된 미각 속에 펄펄 끓는 물의 발화점이 있었다

 

그에게 바친 절정의 시간, 사랑은 쉽게 끓어 넘쳤다

금세 시들어버린 연애는 저온低溫이었다

 

사은품으로 따라온 보온병

물의 온도를 놓치고 머쓱하게 서 있다

 

 

 

 

 

[출처] 보온병 / 마경덕(다시 보기)|작성자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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