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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좋은 시 (23)
문혜정 green time
다큐멘터리 속에서 흰수염고래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죽어가는 고래는 2톤이나 되는 혀와 자동차만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내레이터는 말한다 자동차만한 심장,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도 있는 심장. 나는 잠시 쓸쓸해진다. 수심 4,812미터의 심연 속으로 고래가 가라앉으면서 이제 저 차 속으로는 물이 스며들고 엔진은 조금씩 멎어갈 것이다. 그때까지 마음은 어느 좌석에 앉아있을 것인가. 서서히 죽어가는 고래가 저 심연의 밑바닥으로 미끄러지듯이 가닿는 시간과 한 번의 호흡으로도 30분을 견딜 수 있는 한 호흡의 길이 사이에서, 저 한없이 느린 속도는 무서운 속도다. 새벽의 택시가 70여 미터의 빗길을 미끄러져 고속도로의 중앙분리대를 무서운 속도로 들이받던 그 순간 조수석에서 바라보던 그 깜깜한 심연을, 네 얼굴이..
오늘이 쏟아진다 거리에 전시된 감정은 대부분 무덤덤하다 흐림과 맑음이 겹친 감정은 무표정보다 난해하다 달리는 길은 어제의 기분을 계산해서 거리의 노트에 나열했다 첫줄에 기록된, 사망 5명 부상 78명 시작은 끝으로 마무리되고 정체된 깁스의 시간과 링거의 시간은 늘 같은 표정이다 오늘과 내일의 표정은 예측불허지만 답습한 통계로 날씨를 예감하듯, 불운은 그다지 변동이 없다 지난해부터 오늘로 이어진 구간은 커브가 심한 난코스 무차별 중앙선을 넘어 온 계절은 난폭해서 내일의 비탈길은 예고되었다 먼 곳에서, 유빙이 흘러오는 동안 폭설은 결빙으로 이어지고 수시로 현수막을 바꾸는 도시는 왜곡된 표정을 찍어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지금은 나목裸木의 시간 대부분 표정은 직설적이다 쓸쓸하거나 냉담한 말투는 이 거리에서 자주..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햇살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그늘 기쁨을 더욱 가치롭게 해주는 슬픔..... 햇빛을 햇빛이게 하는 것은 햇빛이 아니고, 그늘일 수 있다. 세상에 만일 햇..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더는 나아갈 수 없다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 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돌아서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너는 도망치게 되리라 여기까지가 내 한계라고 스스로 그어버린 그 한계선이 평생 너의 한계가 되고 말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그만 금을 긋고 돌아서고 싶을 때 묵묵히 황무지를 갈아가는 일소처럼 꾸역꾸역 너의 지경을 넓혀가라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황소처럼 묵묵히 내 길을 가자.^^